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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한담 | 프로와 아마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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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0-04 15:26 조회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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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와 아마의 차이

김정수(시인)

 

추석 연휴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았다.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본 것은 생사의 기로에 선 주인공 슈필만이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 앞에서 연주한 쇼팽 발라드 1을 듣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클래식의 대중화를 선언한 피아니스트 조은하의 콘서트 삐끕쌀롱에서 쇼팽 발라드 전곡을 감상했다. 쇼팽의 발라드 네 곡 모두를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연주를 다시 듣고 싶었지만 영상을 구할 수 없었고, 대신 떠올린 것이 영화 피아니스트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참혹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피처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독일장교 호젠펠트의 연주 지시에 슈필만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건반에 손을 얹는다. 슈필만은 G 마이너의 색채를 살짝 흐리기 위해 강력한 저음의 C로 연주를 시작한다. 가냘프고 느린 초반의 연주는 마치 피아니스트의, 아니 나치 독일에 무참히 짓밟힌 폴란드의 울음을 닮아 있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피아니스트의 불안과 두려움, 독일군 장교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어우진다. 절정을 지나자 점차 부드러워진 선율은 피아니스트의 호흡과 어울려 불안과 두려움을 고요와 무상으로 세계로 이끈다. 피아니스트도, 관객도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하다. 전쟁과 음악의 묘한 하모니다.

영화를 통해 음악을 듣다 보니 귀는 소리에 빠져 있어도 눈은 배우의 손에 머문다. 창으로 스민 햇빛이 피아니스트의 왼손에 앉아 있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명()과 암()으로 나뉜다. 왼손이 밝음이라면 오른손은 어둠이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 어쩌면 선과 악, 극락과 저승의 대비를 보여주는 듯한 섬세한 연출이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그 경계를 넘나들며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조은하의 피아노콘서트에서도 반짝이는 손가락을 보았다. 지정석이 아니었던지라 일찌감치 연주장으로 가 연주자의 손가락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인사를 하는 그의 이마와 콧속에 붙어 있는 밴드가 보였다. 그때부터 ?’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궁금증은 연주를 듣는 내내 몰입을 방해했다. 하지만 불편해보이는 피아니스트는 연주에 흠뻑 빠져 있었다. 발라드 1번이 끝나자 농담을 섞은 유쾌한 진행 멘트과 발라드 2번을 설명하고 다시 연주에 몰두했다. 그 즈음에야 나도 잔잔히 흐르는 선율과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2번 연주가 끝나고 3번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코밑에 붙어 있는 밴드에 핏물이 살짝 배어나왔다. 많이 불편해보였다. 연주를 듣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코밑의 밴드를 적시는 핏물과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콘서트가 끝났다.

연주회가 끝난 뒤에야 연주장 오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을 들었다. 동승했던 가족과 함께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가 연주회를 위해 부득불 연주회장으로 왔다는 것. 그래서 엄마는 오지 못했다고, 피아니스트는 어머니의 지인 관객들에게 대신 인사를 전했다.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목과 허리, 특히 손가락까지 다친 피아니스트는 아픈 몸뿐 아니라 정신을 가다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연주회가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킨 것. 비단 관객과의 약속 때문만이 아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영화 속 슈필만의 연주처럼, 나라 잃은 자의 심정으로 연주해보겠습니다라는 멘트를 준비한 젊은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닿은 건반 위의 핏자국 같은 것. 프로를 만드는 건 그런 열정과 의지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 정작 중요한 연주를 놓친 아마추어 같은 실수가 아쉬웠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