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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정사가 전하는 밀교연재 |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⑧-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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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10-04 15:10 조회8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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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농부심(農夫心)

 

중생의 마음 가운데 농부심이란 것이 있다. 농부라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 속한다. 게으르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경전에서 언급된 농부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대일경소>에 농부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농부심이라 하는가? 먼저 널리 듣고 나중에 법을 구하는 것에 따른 말이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따지기를 좋아하고 행동 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이렇게 설하고 있다.

<농사를 배우는 자가 나이 많은 농부에게 어떤 땅이 좋은지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발 갈고 심으며 김매고, 어떻게 때를 기다리며, 어떻게 수확하여 저장합니까?’라고 묻고, 이와 같이 하나하나 알고 나서 공력을 들이는 것과 같다. 이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먼저 지혜로운 자에게 여쭈어 널리 도품(道品)을 듣고서 그런 다음에 이를 행한다.>

언뜻 보아서 좋은 의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물어보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옳은 것이 아닌가. 모르면 물어봐야 하고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며 일반 상식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직접 본인이 행하지 않고 묻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법문을 수없이 많이 들었어도 행함이 없다면, 그 법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농부심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대일경소>에서 이르기를, <그것은 모두 숙세의 습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날카로운 지혜로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수행을 통해 농부심을 없애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저것 물어보기만 하는 농부심을 독화살에 비유하고 있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마음은) 독화살이 몸에 박힐 때와 같다. 어찌 삼농월(三農月-농사짓는 봄, 여름, 가을)이 끝난 뒤에 널리 물은 다음에 이를(독화살을) 뽑을 수 있겠는가!>

독화살의 비유는중아함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제가 가운데 만동자(?童子)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부처님께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하는가라고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수행이나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하면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 친족들이 빨리 의사를 부르려 하였지만, 화살에 맞은 사람이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크샤트리아인지, 바라문인지, 바이샤인지 수드라인지, 또는 그 이름과 성은 무엇인지, 그의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 정도인지, 그의 얼굴색이 하얀지 검은지, 어떤 마을에서 왔는지 먼저 알아야겠다. 또한 내가 맞은 화살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 아울러 어떤 새의 깃으로 장식된 화살인지, 화살 끝에 묻힌 독은 어떤 종류의 독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농부심은 독화살의 비유와 같이 쓸데없이 묻기만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수행에도 득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살피고 고쳐 나가자.

농부심은 우리에게 그러한 수행정신과 마음자리를 강조하고 있다.

 

하심(河心)

 

하심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하심은 인욕의 하심(下心)이 아니다.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이와 상관없는 말로서 하심(河心)은 하천(河川)에 비유한 마음이다. 하천의 마음을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하천(河川)의 마음이라 하는가? 두 가지의 치우친 법에 의지하여 닦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치우친 법이란 두 가지의 현상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이나 생각이다. 그래서 그 두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성품은 쌍으로 두 변에 의지한다. 어떤 때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常見]을 닦고, 어떤 때는 멸하여 없어지는 것에 사로잡힌 생각[斷見]을 닦으며, 혹은 다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겸하여 닦는다. 마치 하천의 물이 쌍으로 양 언덕에 의지하니 흘러가는 물건도 역시 한 변에 걸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의 대치는 이른바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한 경계에 두면 곧 도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중도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