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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한담 | 교각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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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09-05 16:33 조회1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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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의 그림

 

해가 중천에 떠 있던 어느 휴일 한낮, 늦은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 흐르는 홍제천의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면 25분 만에 한강에 다다를 수 있다. ‘건강을 위하여라는 그럴 듯한 명분이 아닌 그저 시냇물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삶의 여유와 한가함을 즐겨볼 요량이었다. 사실 많은 산책객들과 자전거 애호가들, 애완견으로 복작거리는 낮보다 텃새가 되어버린 청둥오리 가족이 수면 위 바위에서 수면을 취하는 한밤을 더 선호한다. 한강에 이르면 성산대교의 불빛과 강변 버드나무 위로 스러지는 하현달과 바람이 쉬어가는 빈 벤치. 그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홍제천의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는 하천을 중심으로 양쪽을 나 있고, 양방향으로 오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홍제천 위로는 내부순환도로가, 그 교각에는 클림트의 키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고흐의 붓꽃등 서양회화와 이중섭의 황소’,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 박수근의 빨래터’, 장욱진의 자전거를 타는 소년’,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등 한국 근·현대 명화와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비록 모조품이지만 삭막한 콘크리트 교각에 설치된 미술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근사한 미술관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서 바람에 시원함이 배어 있다. 자전거 속도에 반응한 바람이 얼굴에 잠시, 또 잠시 머물다 홀연 사라진다. 천천히, 걷는 사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풍경을 완상하면서 달린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마다 휴일을 나선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다. 역시 나이가 들면 건강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치매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셨는데, 결국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치매에 걸려 대소변을 받아내야만 했다. 운동기구 하나씩 차지해 땀을 흘리는 노인들 역시 그것을 두려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각에 걸려 있는 그림 중에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좋아한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파란 점들이 물결처럼 일렁여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규칙적인 듯 불규칙적인 점들과 그 사이로 이어진 진파랑 선들은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인연의 끈 같기도 하다. 김환기 작품의 절정으로 불리는 이 그림의 제목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 중에 하나, 그 별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서로 마주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아침이 다가올수록 이 사라지고, 화자인 도 죽는 것과 다시 만나는 것은 불교의 인연설과 윤회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김광섭 시인과 친구인 김환기 화백은 1970년 뉴욕에서 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부르면서 캔버스에 점 하나 하나를 찍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캔버스는 우주, 점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다. 그 별 중에 나는 어떤 별에 유독 눈길이 가는가, 저 별 중에 어떤 별이 나를 더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어떤 인연으로 나는 또 저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교각의 그림에도, 물속에 떠 일렁이는 그림에도 본래 그림은 없지만, 그로인해 그림을 보게 된다. 다시 나를, 내 안의 나를 본다. 한강으로 향하던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향한다.

<시인 김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