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연재글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법경정사가 전하는 밀교연재 |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④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19-07-01 20:31 조회995회

본문

밀교연재/ 법경 정사가 전하는밀교문화와 생활(29)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합당한 것에는 고집을 버리고 스스로 수정해야

진호국가불공은 천심을 뛰어넘는 대서원의 불공

 

쟁심(諍心)

<대일경>에서 중생의 60가지 마음 가운데 열세 번째로 설하고 있는 마음이 쟁심(諍心)이다. 쟁심(諍心)은 자기 마음 안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마음이다. 앞에서 설했던 투심(鬪心)과 비슷하나 투심(鬪心)은 다른 사람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쟁심(諍心)은 자기 마음 가운데 스스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말한다. 즉 투심은 타인과 관계가 있고, 쟁심은 자신의 문제다.

<대일경소>에서 쟁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른바 안으로 옳고 그른 마음을 품고 스스로 하나의 뜻을 생각해내고서는 문득 스스로 반대 의견을 내어 다시 그 잘못을 가리거나 또는 좋은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자문을 받았더라도 다시 생각해서 득실을 따져 이 일은 이래야 한다.’ ‘이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모습이 많이 나타나면 이것이 다투는 마음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자기 마음속의 갈등을 말하는 것인데, 득실을 따지고 이해타산을 생각하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중생의 마음이란 만생만멸(萬生萬滅)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갖 생각을 일으키고 분별을 일삼으며 탐진치 삼독심으로 번뇌를 일으킨다.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만 가지 생각이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쟁심이 가득하다.

이와 달리 자기 마음 안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마음이 없는 것을 무쟁심(無諍心)이라 한다.

 

무쟁심(無諍心)

무쟁심은 옳고 그름을 함께 버리는 것이다.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고집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자기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합당한 것이라면 고집을 버리고 언제든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다.

<대일경소>에서 무쟁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치에 합당한 것을 들으면 곧 이것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혹은 먼저 옳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곧 이것을 고치는 것이다. ()에 집착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함께 버린다. 이와 같은 모습이 많으면, 이것을 자기 마음 안에 다툼이 없는 마음이라고 한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합당한 것이라면 자기 고집을 버리고 스스로 수정하는 마음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고집이 강하여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자기 논리와 대의명분에 빠진 경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청(傾聽)과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상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를 마음에 대한 관찰(觀察)’, 다른 말로 마음챙김’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즉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한 이해와 자각이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따라서 지혜 있는 마음이 바로 무쟁심(無諍心)이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다툼이 없는 마음을 알아채고,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서 다툼이 없는 마음을 닦는 것이 쟁심을 다스리는 길이다.”

지혜를 닦아야 하는 이유다. 지혜를 밀교에서는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고 부른다. 여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그 실상을 아는 것이 지혜다.

 

천심(天心)

그러나 중생은 높은 뜻보다 낮은 것에 더 큰 뜻을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세간적 성취라고 말한다. 물론 밀교에서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중요시 하지만 낮은 차원의 개인의 서원성취도 방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방편을 무시하거나 등한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간적 성취를 바라는 중생의 마음을 천심(天心)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심은 하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밀교에서 말하는 천심은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즉 생천설(生天說)에 기인한 말이다. 고대로부터 인도에서는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생천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생천은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 가운데 가장 큰 소원이었다. 이와 같이 소원성취를 바라는 중생의 마음을 천심(天心)이라 한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천심(天心)이라 하는가? 염원에 따라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소원성취를 바라는 천심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쁘다’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천심은 중생의 마음인 것이 명확한 사실이지만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일경소>에서는 진언을 수행하는 사람이 둥글고 큰 과()를 기약하지 않고, 다만 자기 마음을 위해서만 끌어당긴다면 정보리심(淨菩提心)이 아니다. 세간의 성취를 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큰 서원 보다 개인적인 서원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개인의 서원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의 천심(天心)이지만 원대한 서원을 세우는 것은 천심(天心)을 뛰어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서원을 세우더라도 더 큰 서원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715일이면 하반기 49일 진호국가불공을 마치게 된다. 이 불공이 바로 천심을 뛰어넘는 대서원의 불공이다. 옴훔야호사. 옴훔야호사. 옴훔야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