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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의 며느리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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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6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5-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문화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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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이상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도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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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5-12 15:48 조회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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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총지로여는 삶 (6회)

부잣집의 며느리 선발

옛날 어느 고을 부잣집에서 새며느리를 얻는데, 시험을 봐서 뽑기로 했습니다. 시험문제는 한상을 잘 차려주고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에서 한 달을 살아내는 것이며, 자신 있는 규수는 누구든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부잣집 며느리가 되고 싶은 처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단 먹는 데까지 먹고 버티다가, 또 어떤 사람은 조금씩 아껴 먹으며 버티다가, 또 어떤 사람은 이웃집과의 협력과 거래를 통해 어떻게 해 보려다가, 마침내 포기하고서는 이 문제는 사람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모두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의 주인공이 홀연히, 먼길을 오느라 허름하고 지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잘 차려진 상을 받아 우선 배부르게 먹고, 한숨 늘어지게 자고, 그리고 일어나서는 행랑어멈을 불러, 혹 동네에 바느질거리가 있으면 얻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감을 찾고 그것으로 생업을 이어간다면 한 달 아니라 십 년인들 못 살겠습니까? 3일만에 합격하여 부잣집 며느리가 된다는 이야기. 지역에 따라, 시아버지가 3형제 며느리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전에 치르는 시험 이야기로도, 한상 대신 쌀 한 되로, 기간도 한 달에서 석 달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오는데, 시험의 주관자는 집안 살림을 주도하는 시어머니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선가(禪家)에도 전해오는 시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1천7백 공안이라는 것이 모두 선가의 시험문제이긴 합니다만. 6조 혜능의 증손자뻘 되는 백장스님에게 어느날 위산의 주지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백장은 불단에 쓰는 정병(꽃병, 아마 나무로 만든)을 앞에 놓고 "정병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무엇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제1좌(속칭 수제자)는 "말뚝이라고도 부르지 않겠습니다"고 답하고, 영우라는 제자는 발로 정병을 걷어찹니다. 이에 백장은 위산의 주인으로 영우를 인정합니다. 5조 홍인이 법을 이을 후계를 뽑을 때, 당시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인정을 받고 있던 수제자 신수를 제치고, 아직 머리도 깎지 않은 노행자를 인정한 것과 판박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과연 법을 제대로 이어왔다고 하겠습니다. 

*신수의 시 : "몸은 보리수, 마음은 명경대, 부지런히 닦아, 때가 끼지 않게 하리" *노행자(혜능)의 시 : "보리 나무 아니고, 명경 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디 때가 끼리"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도 일하고 돈벌어 모아서 집사고 논사고 밭사서 부자가 된 사람도 있고, 물려받은 재산에 적지 않은 벌이가 있어도 하나씩 팔아 마침내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고 싶은 사람의 생각이 단지 호의호식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사람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할 수 없는 일만 하겠다고 덤비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성공이 어려울 뿐 아니라 성공한다 해도 사는 재미나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일이든 결과에 마음 두기보다는 실행 과정에 힘쓰는 사람이 더 성실하고 창의적일테니 성공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눈 밝은 이는 단번에 그 됨됨이를 알아보는 법이니 지혜와 지혜가 서로 만나고 이어져 대대로 흥하는 집안이 될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뽑는 입장은 그렇고, 뽑히고 싶은 입장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될 때는 뽑는 쪽보다는 뽑히고 싶은 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항상 군계일학으로 갑자기 나타나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 됨됨이와 능력을 어떻게 키웠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과연 바뀌기는 할는지도 의문입니다. 점을 치는 사람들은 길흉을 말하면서도 벗어나는 법은 잘 모르는 듯하고, 사주를 믿는 사람들도 정해진 운명의 힘을 더 강하게 보며, 신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신의 뜻을 믿고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현재의 자신을 이룬 것도 자기이며 앞으로의 자신을 만드는 이도 자기라 말씀하시고 운명을 따르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먼저 뜻을 일으키면 말로 표현하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 실행합니다. 성공하면 반복, 확장하고 실패하면 수정, 보완합니다. 반복된 행동이 습관을 만들고 굳어진 습관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나타납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뜻과 말과 몸으로 만들어 온 총체적 결과이니 내가 나를 만들어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바꾸고 정체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을, 또 행동을, 말을, 뜻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실천 방법은 6행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뜻과 말과 행동을 멈추는 것이 정계, 멈추었는지 아닌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정려, 새로운 뜻과 말과 행동을 연습하는 것이 정진, 어떤 것이 바람직한지 깨닫는 것이 지혜, 주변 사람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음이 안인, 실천이 막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너그럽게 달래는 일을 단시로 나름 꿰맞춰 봅니다. 


사람은 6도 중생 중 가장 성불의 가능성이 높은 존재라고 합니다. 천상의 존재는 육신이 없이 상상으로 사는 존재이니 막힘이 없고 안되는 일이 없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가 없을테요, 축생은 지혜가 부족하고 본능의 힘이 너무 강하여 그것을 이겨내기 어려우며, 지옥과 아귀는 고통을 벗어나는 외에는 생각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만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육신의 고통과 한계를 자각할 수 있으며, 자신을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잘못을 그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지혜와 의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삼세의 업이 나로 인해 생겼으니 나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고, 삼밀관행으로 삼밀가지를 입어 즉신성불한다는 것이 총지의 뜻이니, 총지는 부처님 가르침의  새로운 버전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시시처처로 실행하여 나와 모든 중생들이 함께 불도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옴마니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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