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
페이지 정보
호수 304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3-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3-10 14:46 조회 446회본문
극우 파시즘은 유일신 종교에 뿌리
동아시아의 ‘혼돈’은 긍정적인 의미
장자(莊子)의 <응제왕(應帝王)>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고, 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고 하였다. 어느 날 숙과 홀이 혼돈에게 신세를 져서 보답하려고 논의한 끝에 혼돈에게는 사람처럼 7개의 구멍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다.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어버렸다.”
칠규(七竅)는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 것으로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비선악(是非善惡)의 판단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장자는 칠규의 구멍이 없는 상태를 이상적으로 본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우주를 나타내는 단어로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가 있습니다. 카오스는 무질서한 상태로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면 코스모스가 됩니다. 동아시아에서 혼돈이 긍정적인 의미였다면 서양의 카오스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여기에서 질서를 부여한 존재를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神)을 설정하게 됩니다. 문제는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되면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여된 질서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었을까요?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여 끊임없는 충돌을 조장해 온 것을 실제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1장에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이고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유명(有名), 즉 ‘이름이 있다’라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것이 사물에 이름을 지음으로써 사물이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장자의 혼돈 이야기와 맥락이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주관에 의해 시비를 분별하는 것으로 비판하는 것과 내용이 통합니다.
여기에서 노자, 장자, 불교에서 시비분별 이전의 혼돈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질서가 부여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어떤 절대적 기준을 주장하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행위의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인식 행위를 뒷받침하는 세계관이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불교의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二元論)은 이항대립(二項對立)적 구도로 재편하여 끊임없이 타자(他者), 즉 적을 만들어냅니다. 실제의 역사에서 서구 문명은 타 문명권과 끊임없는 충돌을 유발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21세기로 넘어온 지 벌써 4분의 1일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고, 기후위기에서 비롯한 기상이변과 지진이나 화산 활동과 같은, 말 그대로 천재(天災)와 지변(地變)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러·우 전쟁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포함하여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과 같은 인재(人災)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12월 3일 계엄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빚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선과 악과 같이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억측일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내 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면서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보수(保守)는 보호하고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입장으로, 그 원칙은 현실 사회에서는 법(法)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법, 즉 원칙에 따르는 것이 보수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구(守舊) 내지 극우(極右)는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위해 원칙을 부정합니다. 진보는 변화를 꾀하지만, 그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적법한 절차를 통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려고 합니다. 극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극우와 극좌는 비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극단적인 극우 파시즘과 극좌 폭력행위 둘 다 서양 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극우는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유일신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도 같은 기원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유일신교의 신(神)은 사랑의 신이기도 하지만 분노하고 징벌을 가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불보살은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중생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칭도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지옥 중생을 구제하려는 지장보살(地藏菩薩), 고난 속의 중생들을 제도(濟度)하려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으로 불립니다. 불교의 지옥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받는 과보(果報)로 가는 곳으로 신의 심판에 의해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지금 탄핵 반대 시위가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습니다. 둘 다 교회 목사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