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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과 극락은 자기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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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3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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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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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2-10 12:16 조회 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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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과 극락은 자기 마음에 있다”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4. 인간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향락적, 타락적 생활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과도한 향락은 타락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만큼 인간성이 요구되는 시대도 없으며 따라서 그 가치도 높아진다. 이것은 곧 종교활동과 종교적 신앙생활에서 인간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저마다 선을 주장하지만 마음속에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한 그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진실한 선이란 다만 봉공이다. 이타에 있는 것이다. 즉 소아를 떠나 대아에 봉사해야 한다. 

   인간의 지식의 확대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인간과 이기주의적으로 각축경쟁하는 마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이 악용되어서는 그 지식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평화로운 인간 영락의 인간으로 고차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는 지식 그것보다도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고 적어도 인간성과 지식을 병진시켜야 한다. (중략)

   인간은 목석이나 금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의식구조의 탁월성이니 바로 잘잘못을 아는 의식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곧 가치판단으로 확대되어 의식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화되어 생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의 판단은 결코 전통적인 교육의 결과로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든지 선천적으로 그것을 알 만큼 판단의 가능성을 그 의식 기능 속에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단적으로 인간은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가장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기본적이며 동시에 최대의 특유성인 참회하는 마음이다. 금수는 참회하는 눈물이 없다. 

   이 참회 없이 교육을 통한 지식만 있는 자는 그 지식을 악용하여 자기의 죄과를 합리화하려 들고 선을 가장한 위선에 기교를 부리기에 힘쓰며 진정한 선을 부정하려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 연후에 지식을 가져야 그 지식이 자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선후본말의 원리인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본질적으로 선하기만 한, 결정되고 완료된 존재가 아니다. 부처님도 어떤 사람을 그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고정된 운명에 결박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쉽고 어려운 구별은 있을망정 인간에게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형성할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보살도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생활과 교조를 원만하고 정당하게 결부시켜야만 생활불교가 되는 것이다. 교조를 위주로 한다면 생활은 교조의 노예가 될 것이요, 생활을 위주로 한다면 교조는 한갓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율배반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불설, 그것은 곧 인간생활의 향상을 위한 것이며 그에 입각한 생활은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내세와 피안을 하나의 실재하는 제2의 세계라고 볼 때 흔히 현실적 생활을 등한시하는 현실도피적 인간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많다. 그 반면 내세나 피안을 부정하는 반종교적 인간에게는 현실지상으로 현실적 해결에만 급급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적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 우리는 인간의 현실 속에는 이미 피안성이 주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심성에는 내세와 피안의 심층이 있다. 피안과 극락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안은 인간의식속의 영원이며 차안은 인간의식속의 시간이다. 영원에 사느냐 시간에 사느냐가 문제다. (이하 생략)


   인간이 본래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의 문제는 철학과 종교의 근원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철학자나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인간의 본성이 원래 이기적일까, 이타적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천인공노할 범죄자 뿐 아니라 가까이에서 아주 무례하고 뻔뻔한 사람 때문에 고생을 할 때면 사람의 본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남 이야기 할 것 없이 스스로를 돌아봐도 늘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 한 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말이니 성선설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부처가 될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아와 무상의 이치에서 봤을 때 불성 또한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니 선사들이 이야기하듯이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   

   욕심 사납고 어리석은 중생에 머물지, 번뇌 망상을 여읜 부처로 나아갈지,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스스로 찾고 싹 틔우면 불성은 있는 것이고, 그런 게 어디 있고 무슨 필요가 있냐며 세속적 욕망만을 추구하면 불성은 없는 것이다. 물론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무엇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불성 또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설사 부처님이라 해도 중생의 업을 바꿔줄 수 없고 모두 구제해줄 수도 없다고 했다. 구원자는 없다. 업과 과보는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며 이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이도 본인뿐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인지능력과 자각능력이 있으며 삶을 만들어가는 의지와 힘이 있다. 성찰의 핵심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참회로, 발심과 서원으로, 보시와 동사섭으로 불성은 발현된다.

   

   앎과 행의 관계 또한 근본적인 화두이다. 새의 두 날개처럼 상호보완하는 동시적인 관계이지만 자주 삐걱거리고 틀어진다. 

   국내외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소위 엘리트나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알량한 지식과 학벌로 사회를 얼마나 어지럽히고 있는지 우리는 수시로 목도한다. 그에 반해 크게 배운 것 없는 촌로와 평범한 이웃에게서 웅숭깊은 지혜와 참된 인품을 훨씬 자주 만난다. 

   젊은 시절 불교 동아리와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뜬구름 잡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사변을 늘어놓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무시하곤 했다. 불교계에서 일하면서도 어쭙잖은 사람들을 꽤 만났다. 불교교리를 좀 안다고 어찌나 아는 체 하고 잘난 체를 하는지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다가왔다가도 저런 사람들 때문에 달아나겠다 싶을 정도다.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올 때는 알음알이를 내려놓으라 했다. 아는 것이 이기적으로 쓰이거나 자기 합리화로 치닫거나 고집과 아집으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근본 마음자리가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지식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되고 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된다고 비유하셨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조차 잘못 쓰일 수 있다. 단 한 마디 말씀이라도 그 가르침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스스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때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반야 지혜가 되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가 개인의 지위와 자산을 독점하고 강화하는 무기가 되었다. 탈종교화의 흐름도 거세다. 젊은 세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가식적이고 집단이기주의화 된 종교의 모습에 거부감도 크다. 

   그럼에도 불교가 대안이다. 물질과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마음속 고뇌와 번뇌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의 번민은 훨씬 복잡하고 심층적이다. 이것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 불교철학과 불교수행에 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길이 불교에 있다고 믿는다.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 불교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해탈 열반과 성불이라고 하는 불교의 이상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세와 피안을 부정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내세와 피안이 어딘가에 실재한다고 여기지도 말라는 원정대성사의 말씀은 중요하다. 현실에 매몰돼 세속적인 욕망에 치우치는 폐해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사실은 무기력하고 쓸모없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피안과 극락이 마음에 있으니 보살 수행자가 되어 성불의 길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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