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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구제 사명 안다면 무량복 짓는 일 고행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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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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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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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2-05 12:15 조회 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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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구제 사명 안다면 무량복 짓는 일 고행 아냐”

윤금선 작가와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2. 고행(苦行)으로 작복(作福)

불교는 생사열반(生死涅槃) 즉 살아서도 안락(安樂). 죽어서도 안락, 고행(苦行)은 세간(世間) 고통(苦痛)을 소멸(消滅)시킨다. 불교의 고행은 세간 수백배(數百倍)의 고통을 능히 소멸(消滅)하느니라. 이러므로 세간을 관(觀)하는 것도 역시(亦是) 그렇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단 현세의 고통만 소멸시킬 뿐 아니라 또한 내세의 고통도 소멸시키는 고로 내세(來世)의 극락(極樂)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석존(釋尊)은 나무 밑에서 고행하여 일체 중생에게 능히 복을 주고 고통을 소멸케 하였느니라. 악을 지어 고통받는 그 고통을 다 해탈(解脫)시키고 고행하여 선(善)짓는 것은 그 복이 무량하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숨이 턱에 차게 달리거나 땀을 쏟으며 가파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힘은 들지언정 공부에 매달리거나 고된 훈련에 매진하는 사람이 있다.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고역인 사람도 있다. 성향에 따라 다르고 동기와 목표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소박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회에 공헌하고자 어떤 한 분야에서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찾고 인격을 도야해 성인 내지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자 애쓰는 사람도 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은 더더욱 달라진다.


   고통과 고행은 뉘앙스가 살짝 다르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상황이 주어지는 느낌이 들고, 고행은 무언가 목표가 있어 스스로 힘든 상황을 자처하고 감내하는 느낌이 강하다. 어쨌든 미래의 결실을 위해 어렵고 힘든 일을 달게 받아들이는 한, 고통은 고통에 머물지 않고 거름이자 자양분이 된다.

   『초발심자경문』에서는 ‘자신의 즐거움을 능히 버릴 줄 알면 다른 이들이 성인과 같이 믿고 공경할 것이고, 하기 어려운 수행을 능히 해낸다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고행 자체가 길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와 락에서 모두 벗어나 중도를 가라 하셨다. 고행이 곧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 욕심을 버리고 아상을 여의는 것이 핵심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부차적이다. 

   누더기를 걸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장좌불와를 하고 무문관 수행을 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고 존경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수행하는 것은 아상과 욕심을 버리고자 함이고, 아상과 욕심을 버려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또한 가식일 뿐이다. 마음의 살림살이가 어떠한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질적인 욕망을 절제하면서도 그런 스스로에 대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수행을 오랫동안 했다는 분들 가운데에도 일반인을 한심하게 바라보거나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아상을 여의고 탐진치 삼독심이 없을 때라야 진실한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라면 저절로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 것이고, 그러면서도 누구도 마다하거나 가리지 않고 친절을 베풀고 넉넉하게 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따르는 고행은 전혀 고행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위나 장에 탈이 나면 평소 그렇게 좋아했던 음식들을 멀리하게 된다. 튀긴 음식,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 달콤하고 상큼한 맛깔스런 간식들이 부담스러워진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니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심심하고 맹탕인 음식들을 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다보면 아무 맛도 없는 담백한 맛의 매력을 조금씩 알게 되기도 한다.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 가운데 진정 내 몸에 좋았던 것이 얼마나 될까? 진정 나를 위해 먹은 게 맞기는 한가? 음식뿐이 아니다. 우리가 좋다고 하고 즐기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이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면 돈도 필요 없고 자식도 필요 없으니 더 늦기 전에 내 몸 내가 아끼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건강을 챙기기 시작하고 자신을 위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좋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 여행도 다닌다. 

   돈 벌고 자식들 키우느라 바삐 산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져 이제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왔는지 모르고 어떻게 갈지 모르는 인생살이. 정신없이 와서 흐릿하게 살다가 혼미하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때 필요한 것이 수행이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숱하게 고통을 받아왔던가? 그저 상황이 닥치는 대로 웃고 울며 이리 휩쓸리고 저리 넘어지며 인생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허탈해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덩달아 그렇게 살고, 별 뾰족한 수가 있나 하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고, 나름대로 맞는 길이라 여기며 살았지만 솔직히 확신은 없다.  


   소를 키우는 다니아가 우기를 앞두고 철저히 대비했다며 부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밥도 지어 놓았고 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움막의 지붕도 이엉을 잘 덮어놓았고 밤에 밝힐 불도 지펴놓았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이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끈질긴 미혹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 쉬리라.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길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열심히 생활하고 철저히 준비하면 세상살이의 두려움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분노와 욕심까지 벗어난다면 그야말로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겁내거나 무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보살은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에 의지한다고 하지 않던가? 

   수행자의 고행이 실은 고행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욕심을 떠나고자 하니 많이 가지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거듭 기도하고 수행한다. 세상의 이치를 알면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사뭇 달라진다. 무상하니 언젠가 다 사라질 것을 알면 그 무엇에도 연연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진리를 마음에 담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 한 시간이라도 더 앉아서 공부하고 기도하려 들 것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조금이라도 다가가 팔을 걷어 부칠 것이다. 법희선열의 기쁨, 보시공덕의 행복, 중생구제의 사명을 안다면 선을 짓고 무량한 복을 짓는 일들이 고행이 아니라 여기며 흔쾌히 정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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