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고 간절하게 불공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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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0-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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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0:48 조회 70회본문
“진실하고 간절하게 불공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터”
1974년부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 법을 설한 것을 근간으로 삼아 2세대를 제도한 교도에게 시교試敎의 지위를 부여하고 5세대를 제도한 교도에게 전교傳敎의 지위를 부여하여 전 교도가 교화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스승을 위한 공제기관인 ‘심우회’를 설치하여 건강, 재해, 자녀교육, 노후 등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반 복리후생제도를 법규화했다. 오늘날의 연금제도를 이미 50년 전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만드는 길이니 때로 잡음과 불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상을 드러내 남 앞에 서려 하여 자신과 남 모두를 아프게 하는 일도 있었다. 분란이 있을 때마다 대성사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꾸짖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진실이 자연히 드러나도록 불공으로 이끌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결같은 답을 주셨다.
“법계에 물어보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불공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터이니 그에 따라 행하라.”
실제로 대성사로부터 불공법을 배워 행한 후 원하는 바를 이루는 일이 일어나면서 소문을 듣고 영험을 얻으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밀교 수행에는 신통이 따르는 일도 있으나 대성사는 그 또한 경계하라고 일렀다.
“수행하여 도를 닦는 일은 즉신성불을 목적으로 일체 애욕을 탐하는 마음과 원한과 원망을 끊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신통으로 세상사를 희롱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또한 “신통력과 주문은 밀교적이기는 하지만 밀교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오직 자신의 삼밀수행으로 부처님의 가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통을 얻는 것이 밀교 수행의 목적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법계는 진실하니 시비는 반드시 가려지고, 설혹 그 시간이 길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인간의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지 말 것을 일깨웠다.
대전과 대구에 선교부가 차례로 문을 열고 곧이어 총지종 총본산의 불단을 세우는 불사가 진행된다. 1973년 3월 26일 서울 종암동 123번지 26호의 3층 건물과 대지를 사들이고 총지종의 많은 스승과 교도들이 모여 불단 이설 불사를 거행했다. 서울선교부로 시작했으나 성북선교부로 간판을 고쳐 달았고, 대성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당면한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종단 불사인 중요 경전을 번역했다. 성북선교부는 정통 밀교를 복원하는 법계의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터전이 되었다.
당시 대성사의 일과는 시곗바늘처럼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았다. 건물은 본디 인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하숙집으로 쓰던 곳이라 이리저리 방을 들여 좁고 불규칙한 꼴이었다. 대성사가 머문 곳은 대략 한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었다. 방 안엔 다른 치장 없이 오직 경을 보는 데 필요한 작은 경상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필사해 온 밀교 경전들을 살펴 읽고 번역하는 작업으로 하루의 절반가량을 보냈는데,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떤 경우에도 경을 덮어 일과를 지켰다.
아침에 일어나면 의복을 차려입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우선 평생 함께하던 라디오를 켜고 세상 사정을 들었다. 라디오는 닳고 닳았지만 새로 바꾸지 않고 옛것을 그대로 썼다. 정확한 시간에 시보를 알리고 세상 소식을 전하는 통로로 삼았다. 자신이 정한 불공과 기도에 어긋남이 없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맞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정에 맞는 수행법과 불공을 가르쳤다. 대성사는 스스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이 되면 어떤 경우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다음 예정된 일을 했다. 정해진 일은 결코 미루거나 행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 씀 하나가 온 법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밀교행자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법을 설할 때면 일체 사사로운 이야기를 섞는 바 없이 오직 경에 나오는 가르침만을 전했다. 경에 근거하지 않는 법은 입에 담지 않았고, 의궤를 정하거나 불단을 세울 때도 경전을 찾아 부처님 교설에 의하여 행했다.
대성사의 경전 탐구는 멀리 일제강점기 하얼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패망을 미리 예견하고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바 불교에 마음을 두고 경을 찾고 불교 서적을 탐독했었다. 이때 심은 보리의 씨앗은 후에 불교총전과 밀교장경을 만들 때 고스란히 담겨 총지종의 보배가 되었다. 특히 비밀의궤는 의식이 주가 되는 밀교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은 현대 한국밀교의 위대한 성과이다. 그 의궤 하나하나를 교리와 경전 가르침에 맞춰서 정하였다.
의식은 사원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여법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고결식과 기제식에 필요한 용구로 왕생막과 법등을 제작했다. 왕생다라니도 고안하여 생활 속에 밀교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역경 불사는 교도들에게 불교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 현밀 양교의 경전을 골라 엮은 ‘불교총전’부터 시작했다. 대장경 속에서 중요한 내용과 불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골라내 직접 우리말로 옮겼다. 1964년 출범한 동국역경원이 당대 최고의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추진한 것과 비교하면, 대성사 혼자 힘으로 대장경의 주요 내용을 발췌, 정리하고 당시 이름조차 생소한 밀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하지만 천부적인 언어감각을 타고난 데다 일본어, 만주어, 중국어, 한문, 영어, 러시아어까지 섭렵한 터라 번역은 유려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옮겨졌다. 당시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불교 문헌이 많지 않아, 스승들은 그 자료를 포교 현장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지는 않았지만, 유인물의 형태로 보급되어 차곡차곡 성과가 쌓였다. 초창기의 ‘불교총전’이 그렇게 탄생했다.
경전의 우리말 번역에 각고의 노력을 이어온 대성사는 1977년 5월 22일 총지종의 소의경전인 불설대승장엄보왕경 전4권과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전10권의 한글 번역을 완성했다. 불교 전반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밀교종단인 만큼 밀교의 가르침을 펴내는 일은 가장 시급한 불사였다. 진각종 시절 직접 편수했던 밀교성전 가운데 골수인 대승장엄보왕경과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을 다시 번역하고 검수하여 이 두 경전을 묶어 ‘밀교장경’이란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종단에서 삼밀수행을 하는 이유와 각종 의궤와 법식에 대한 경전의 근거를 확실히 세운 것은 진각종 시절 겪었던 수행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밀교장경’은 종단의 정체성과 특별함을 세상에 알리는 근본이 되었다. 누구나 밀교가 어떤 가르침과 수행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도록 인도하는 종교적 정수이다.
1972년 10월 17일 최초 발간된 ‘총지교전’ 간행에 관한 대성사 육필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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