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의 가지(加持) 은덕은 진실한 믿음과 자비 실천이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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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0-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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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0:43 조회 157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2절 현밀이교의 차이점
3. 용어해설
현밀이교론(顯密二敎論)에는 난해(難解)한 용어(用語)가 많을뿐 아니라 밀교에는 특수한 용어가 많으므로 초학자(初學者)를 위하여 필요한 용어만을 다음에 대략 해설(解說)한다.
1). 가지(加持) - 중생(衆生)이 전일(專一)하게 부처님을 믿어서 불이 중생(衆生)에 대하여 신비적(神秘的)인 힘을 가(加)하고, 중생은 그것을 받아서 가지므로써 불과 중생이 교류(交流)하여 일체(一體)가 되고 여러 가지로 효험(效驗)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신비적(神秘的)인 힘을 가진 사람이 기적적(奇蹟的)인 행동(行動)하는 것도 가지라고 하며 이러한 경우에 기도(祈禱)와 합하여 가지기도라고 한다.
2). 가행(加行) - 밀교(密敎)를 정식(正式)으로 수법(修法)하는 의식(儀式)이다. 전법관정(傳法灌頂)을 얻는 전단계(前段階)의 수행(修行)을 말한다. 십팔도(十八道), 금강계(金剛界), 태장계(胎藏界), 호마(護摩)의 사종(四種)의 수행법(修行法)을 합하여 사도가행(四度加行)이 조직(組織)된 것이다.
3). 갈마(羯摩:범梵) - 갈마금강(羯磨金剛), 갈마륜(羯磨輪), 갈마저(羯磨杵), 십자금강(十字金剛), 잡색금강(雜色金剛)이라고도 한다. 삼고저(三鈷杵)를 십자(十字)로 조합(組合)한 법구(法具)다.
삼고저(三鈷杵)는 신ㆍ구ㆍ의(身口意)의 삼밀(三密)을 의미(意味)하고 두 개의 삼고저(三鈷杵)를 조합(組合)한 것은 불의 삼밀(三密)과 중생의 삼밀이 합일(合一)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수법(修法)의 성취(成就)를 기원(祈願)하고 단(壇)의 네모퉁이에 팔엽연화(八葉蓮花)의 갈마대(羯磨臺)의 위에 얹어 놓는 것이다.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의 상징(象徵)으로 되어있다.
4). 결계(結界) - 일정한 구역(區域)에 한(限)하여 청정(淸淨)한 세계(世界)를 만드는 것이다. 또는 그 토지(土地)를 말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수법을 행할 때 마장(魔障)이 드는 것을 우려(憂慮)하여 단상(壇上) 또는 일정한 구획에 한하여 말뚝을 치거나 혹은 말뚝을 치는 결인(結印)과 진언(眞言)으로써 개자(芥子)를 흩는 등의 의례(儀禮)를 행(行)한다.
5). 관정(灌頂) - 인도의 제왕(帝王)이 즉위(卽位)할 때 왕위(王位)를 계승한 표적으로 두정(頭頂)에 물을 드리우는 습관에 기원(起源)을 둔 것으로 밀교에 도입되었다. 받는 자(者)의 이마에 병의 물을 드리우고 법을 전수(傳授)한 것을 표시(表示)하는 의식(儀式)이다.
관정(灌頂)의 종류(種類)는 경전(經典)과 의궤(儀軌) 따라 일정(一定)하지 아니하나 가장 일반적(一般的)인 것은 재가(在家)를 밀교에 결연(結緣)하는 결연관정(結緣灌頂)과 행자(行者)에게 진언(眞言)을 전수(傳授)하는 수명관정(受明灌頂-학법관정學法灌頂)과 밀교상승(密敎相承)의 정식의식(正式儀式)인 전법관정(傳法灌頂)의 삼종(三鐘)이다.
6). 금강저(金剛杵) - 손잡이의 양단(兩端)이 예리(銳利)하게 뽀족한 형상(形狀)을 한 법구(法具)인데 인도에서는 원래(元來) 무기(武器)로서 사용(使用)되었고 제석천(帝釋天), 집금강(執金剛), 밀적력사등(密適力士等)이 우수(右手)에 들고 있다. 양단(兩端)에 있는 칼날의 수(數)에 따라 독고저(獨鈷杵), 삼고저(三鈷杵), 오고저(五鈷杵), 구고저(九鈷杵) 등이 있고 자루의 형상(形狀)에 따라 탑저(塔杵), 보주저(寶珠杵) 등으로 분류(分類)된다. 밀교에서는 그것을 외적(外敵)을 타도(打倒)하는 무기(武器)로 하지 않고 인간의 심중(心中)의 번뇌(煩惱)를 쳐부수고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지혜(智慧)의 광명(光明)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라고 간주(看做)하고 있다.
7).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 대승장엄보왕경소설에는 ‘관자재보살이 중생구도(衆生救度)를 시작 한 것은 무량겁전(無量劫前), 비바시불(尾鉢尼佛)때 부터이다.’ 그러므로 이 관자재보살이 경전상(經典上)으로 볼 때 모든 관음의 원초(原初)가 되고 근본(根本)이 된다. 관음중에는 변화관음(變化觀音)과 변신관음(變身觀音)의 두가지가 있는데 준제관음(准提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등의 관음이 변화관음이요.
피엽의관음(披葉衣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다라관음(多羅觀音), 청두관음(靑頭觀音). 양류관음(楊柳觀音), 아마래관음(阿魔䶝觀音), 감득관음(感得觀音), 삼십삼관음(三十三觀音), 등은 변신관음(變身觀音)에 속한다.
성관음(聖觀音)이란 이들 변화관음(變化觀音)과 변신관음(變身觀音)을 총칭(總稱)한 것으로서 추존경앙(推尊敬仰)의 뜻으로 성자(聖字)를 부치는 것인데 대승장엄보왕경의 관음은 성관음(聖觀音)에 해당하는 것이다.
현교에서는 관음을 다양(多樣)하게 분류(分類)하지 않고 명호(名號)만 부르며 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에 그 공덕(功德)만 찬탄(讚嘆)하였고 조상(造像)도 단순(單純)하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관음을 다양하게 분류하여 형상(像)도 다르고 인상(印相)과 진언(眞言)도 각각 다르다. 이는 유구필응(有求必應)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구도심(救度心)의 발로(發露)로서 천만가지의 중생의 소원(所願)을 다 들어 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밀교경궤(密敎經軌)에 상술(詳述)되어 있다. 따라서 칭호(稱號)도 현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고 주로 부르고 있으나 밀교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있는데 이는 제법자재(諸法自在), 변화자재(變化自在), 구도자재(救度自在)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하생략
처음 총지종 일을 맡았을 때 낯선 단어 가운데 하나가 ‘가지(加持)’였다. 뜻은 ‘가피(加被)’와 같다. 즉 불보살님이 자비심을 베풀어 중생을 보호하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믿고 의지하고 수행하여 얻게 되는 신비한 힘이다. 범어 Adhiṣṭhāna를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 사이에는 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가피’라고 하면 은혜를 입고 가호를 받는다는 뉘앙스가 짙다. 불보살님의 베풂을 갈망한다는 느낌이 조금 더 강하다. 그런데 ‘가지’라고 하면 불보살님과 기도하는 우리가 살짝 더 나란히 서는 것 같다. 가진다, 지닌다는 한자의 뜻 때문인지 우리의 역할과 노력이 보다 부각된다.
물론 두 낱말은 공히, 불보살님과 수행하는 이가 상응하고 계합해야 한다. 불보살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니 이를 믿고 만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비유하면, 주파수를 맞췄을 때 방송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과 같고, 거는 이가 있고 받는 이가 있을 때 통화할 수 있는 것과 같으며, 스위치를 켜야 전등이 켜지는 것과 같다. 불보살님을 만나고 그 신비로운 힘을 체험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예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불보살님을 직접 뵙고자 정진했다. 불보살님은 대부분 너무나도 흔하고 허름한 존재로 나타나곤 한다. 차별하지 않는 이에게는 찬란한 가르침을 전해주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매서운 가르침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만다.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을 전한 자장 스님도 말년에는 죽은 개를 삼태기에 넣고 나타난 노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쳤다. 그때 문수보살은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사자좌 위로 빛을 뿜으며 멀리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화는 원효 스님에게도 전한다. 의상 스님이 동해안 낙산의 작은 굴에서 기도 정진해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데 반해 원효 스님은 벼를 베고 있는 여인이 건넨 더러운 물을 거절하는 바람에 아득히 멀어져가는 파랑새를 속절없이 바라봐야만 했다. 일찍이,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이치를 깨달은 원효 스님조차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잠시라도 상에 얽매이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티베트에 전하는 인도 아상가(무착) 스님의 용맹정진 일화는 기도의 감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한다. 미륵보살을 친견하고자 깊은 동굴에서 수행한 스님은 3년이 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자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때 새들의 날갯짓으로 바위가 패인 것을 보고 다시 돌아가 수행했다. 그 후로도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을 보고, 또한 쇳덩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노인을 보고 수행을 거듭했지만 끝내 미륵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9년의 수행을 포기하고 길을 떠난 스님은 온몸에 상처가 나 죽어가는 개를 만났다. 자비심이 차올라 상처에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없애려 하다 그들 또한 생명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혀로 벌레를 옮기고 개를 치료해주었다. 그 순간 개는 사라지고 찬란한 빛 속에서 미륵보살이 나타났다.
이렇듯 진실한 믿음과 자비심의 실천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불보살의 가지이다. 눈앞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꿈에서나마 그 모습을 뵙고 큰 병을 이겨내거나 고난에서 벗어난 사례는 훨씬 많아서 지금도 주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간절한 믿음과 쉼 없는 수행 없이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불교신앙이 관세음신앙이다. 불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도는 알고 있으니 불교신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칭호보다 ‘관자재보살’이라는 칭호에 한층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하고 굽어 살피는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형상화할 만큼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데 온 마음을 다한다. 고달프고 힘겨운 일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 중생들에게는 이처럼 반갑고 든든한 존재도 없다. 나의 아픔과 괴로움을 알아주는 분이 계시니 험한 세상을 견뎌낼 버팀목이자 의지처가 된다. 원력의 힘이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면 중생구제의 능력이 훨씬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중생들마다 처지가 다르고 소망이 다르니 가지 못할 곳도 없고 하지 못 할 일도 없는 자유자재함이 미덥다. 간절히 부르는 이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올 것이고, 언제 어느 때든 다가와, 무엇이 되었든 도와주리라는 믿음은 안심과 위안을 준다.
신이한 가지력이 어서 나에게도 미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또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받은 무수한 은혜와 알게 모르게 입은 불보살님의 명훈가피에 감사하며 서원을 세운다.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감응하는 관자재보살의 대자대비한 원력과 무애자재한 능력이 지금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먼저 가닿기를 기도한다. 그 가지력이 넘치고 넘쳐 나와 남이 모두 편안하고 행복한 그 날까지 우리의 서원과 기도는 끝이 없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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