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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제진언수행법을 찾아내는 순간 환희심에 차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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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3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4-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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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4-09 14:31 조회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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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30회)

준제진언수행법을 찾아내는 순간 환희심에 차오르다

진각종 총인이 된 후에도 대성사는 역경과 교리 확립, 밀교 의식의 규정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밀교는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현실 속에서 정법이 구현되고 대승의 원력으로 개인과 세계를 구제할 근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의 진언, 하나의 의식, 하나의 경전 낱낱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은 밀교의 가르침을 진실하고 틀림없이 세상에 전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밀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책과 경을 구해오는 일도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기꺼이 맡았다. 밀교 교리의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소의경전의 발굴도 이루어졌는데, 대일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반야심경 등이 추가되었다. 경전을 근거로 밀교 수행을 정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수행과 교리를 모두 부처님 법에 맞게 갖추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다른 이에게 맡길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교도들과 스승들도 밀교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이들이 많지 않았다. 수행으로 밀법의 오묘함을 체득한 이들은 있었지만 경전을 해박하게 이해하는 노력은 수행에 대한 열의만큼 깊지 않았던 점도 있었다. 


1965년 6월 22일 전국적인 반대 속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됐다. 그에 따라 한국과 일본 문화교류의 물꼬를 불교계에서 텄는데, 1968년 해인사에서 열린 한일불교도대회는 대성사의 종교 이력에 큰 전환점이 된다. 대회에 참석한 일본불교 대표들은 밀교를 표방한 신흥종단 진각종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현교 종단들에 비해 수행과 외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불교 대표단은 심인당을 방문해 본당을 둘러보고 대성사에게 이런 의문을 남겼다. “진각종은 대일여래를 교주로 모시면서 진언은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으로 하는 것은 수긍할 면이 있다. 하지만 대일여래의 지권인을 수인으로 수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신밀과 구밀의 수행이 일치하지 않는 점은 밀교의 근본 수행법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가 육자진언을 염송하는 근거로 어떤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가를 물었으나 당시에는 딱히 답할 내용이 없었다. 교리 체계가 미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부족함이었기 때문이다. 정통 밀교와 유사 밀교를 가늠 짓는 잣대는 분명했다. 대성사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일여래(大日如來)를 교주(敎主)로 하지 않거나 대일여래를 교주로 하더라도 삼밀을 경궤(經軌)대로 하지 않고 관법(觀法)과 사종수법(四種修法)이 결여되면 그것을 유사밀교(類似密敎)라 한다. 밀교의 삼밀은 본존(本尊)과 그 본존의 진언(眞言)과 그 본존의 결인(結印)이 합치되어야 완전한 삼밀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합치되지 않고 본존과 진언과 인상(印相)이 각각 다른 불보살의 것을 종합하여 삼밀관행(三密觀行)을 하는 것은 이것이 유사밀교(類似密敎)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궤에 어긋나고 삼밀의 원리에 위배되는 까닭이다.”


정통 밀교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가 대성사의 심중에 무겁게 남았다. 납득하지 못할 일을 지나쳐 넘기지 못하는 성품이라 경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밀법에 대한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있으면 경전 전체를 살폈다. 당시 연구 환경은 지금과 같지 않아 국립중앙도서관과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만 대장경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고려대장경과 신수대장경 전체를 뒤지고 연관되는 내용을 찾으면 공책에 옮겨 적어 일일이 필사하거나 사진 촬영을 해서 사본을 만들었다. 그것을 일일이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어려운 작업을 홀로 해야 했다. 종단에는 그럴 인력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뼈저린 노력으로 대성사가 찾아낸 것이 대승장엄보왕경(大乘莊嚴寶王經)이니 밀교의 뿌리와 관자재보살의 인연을 밝힌 것이다. 


“석가모니불 이전 과거불인 시기불 때 관자재보살이 이미 보왕경을 설하고 또 비사부불 때는 부처님이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관자재보살로부터 보왕경을 들었다는 것을 보면 밀교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후 무수한 겁의 시간이 지나 부처님이 입멸한 후 800년대에 남천축 철탑 속에서 십만 송의 밀교 경궤가 출현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금강지(金剛智), 선무외(善無畏) 등에 의하여 혜과(惠果)에게 전하고, 혜과로부터 신라에서 혜일(惠日)과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 법을 받았고, 일본에서는 공해(空海)가 법을 받았으나, 공해보다 혜일이 먼저 법을 받았으니 법형(法兄)이 되는 것이다.”


당시 밀교 경전 대부분을 살피며 대성사는 밀교의 근본과 수행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다. 신라 이후 흩어진 밀교의 맥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 자신의 할 일이란 점은 분명했다. 끊어진 길을 다시 이어가려면 난관이 있고 당장은 세상의 이해를 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진각종과 맺은 인연을 마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승장엄보왕경을 찾아 육자진언의 연유를 밝힌 후 대성사가 몰입한 것은 밀교 신행체계의 확립이다. 남의 이해를 구하기 전에 자신부터 납득할 수 있어야 했기에 치열한 탐구와 내적인 증명이 필요했다. 


경에서 설해지는 “관자재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무량겁 전, 비바시불 때부터이다.”는 구절을 통해 관자재보살이 경전상 모든 관음의 원초이며 근본이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관세음보살이 인간세계를 교화하기 위해 현신하는 분이 준제관음보살이며, 준제는 청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수행을 위해서는 준제관음진언인 ‘나무 삿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단야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를 염송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것이 소위 준제관음법인데, 이는 현대 한국밀교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준제진언은 모든 진언을 두루 통하고 있으므로 진언 중에 진언으로 바다와 같은 진언이며, 불모다라니라 하는 연유이다. 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경에는 준제진언이 “일체 재앙을 소멸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신속히 성취하도록 하는 위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업의 과보 속에서도 누구나 받아 외울 수 있으니 중생을 위한 진언이고, 여의주와 같으니 모든 진언을 염송할 수 없다면 준제진언만이라도 염하라는 것이 예부터 전하는 가르침이었다. 진언의 위력뿐 아니라 깊이 있는 염송은 주변을 청정하게 하고 진언자를 청정하게 하며 어떤 장애도 넘게 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전래되는 내용이다. 대성사는 준제진언의 수행법을 찾아낸 순간 한편 환희심을 얻었고 한편 앞날의 장애를 알 수 있었다. 진실과 진리는 모두를 위한 일이지만, 인간의 욕심은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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