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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벗은 친하고 나쁜 이웃은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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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3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4-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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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4-09 14:27 조회 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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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벗은 친하고 나쁜 이웃은 멀리하라

鳥之將息 必擇其林 새가 쉴 때에는 숲을 가려서 내려앉듯이

人之求學 乃選師友 사람도 배우려면 그 스승을 잘 택해야 한다.

擇林木卽其止也安 좋은 숲을 찾으면 편히 쉴 수 있고

選師友卽其學也高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덕이 높아진다.

故, 丞事善友 如父母 그러므로 좋은 벗은 부모처럼 섬기고

遠離惡友 似寃家 나쁜 이웃은 원수처럼 멀리해야 한다.

鶴無烏朋之計 학은 까마귀 벗할 생각이 없는데

朋豈鷦友之謀 봉새인들 어찌 뱁새를 짝할 마음이 있겠는가.

松裏之葛 直聳千尋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칡덩굴은 천길이라도 올라가지만  

茅中之木 未免三尺 잔디 속에 있는 나무는 석자를 면할 수 없다.

無良小輩 頻頻脫 어리석은 소인배는 그때마 다 멀리하고

得意高流 數數親 뜻이 크고 높은 사람은 항상 가까이하라. 야운 선사 『자경문』 중 


 세상 삶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뭐니뭐니 해도 대인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끼리 어울리는 일로 해서 살아가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사람의 일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을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져 허위적 거리기도 합니다.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나머지 생애를 포기하고 마는 것도 대개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뛰어넘지 못한 데서 오는 비극적인 종말입니다.


믿고 의지하면서 좋은 일에나 궂은 일에나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복 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이 삭막한 세상에서 커다란 위안이요, 의지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항상 가까이는 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나 스승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많이 가질 수도 없습니다. 전 인생의 과정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무슨 일이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단 한 사람이라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찬가를 부를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구인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걸핏하면 헐뜯으려는 거짓 친구가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요. 이웃의 불행을 마치 자기 자신의 행복의 척도로 삼으려는 그런 사이비 친구가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흔한가요. 이런 속성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독이요, 중생의 부끄러운 영역입니다. 거듭거듭 태어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먼저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야 합니다. 그 많은 불사와 법회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중생의 어두운 탈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형성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밖에 어떤 공덕을 바라서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현실적인 삶에 개선이 없다면 신앙은 무의미한 것, 그것은 한낱 타성에 젖은 습관이요 중독상태입니다. 그래서 개선이 없는 그릇된 신앙생활을 가리켜 마약과도 같다고 합니다.


한국불교의 선각자인 고려의 목우자 보조 스님은 처음 발심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글 첫머리를 이와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처음 발심한 사람들은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친구의 영향이 어떤 것임을 경계한 가르침입니다. 늘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안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듯이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개별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이며, 자신이 원하건 않건 간에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그것이 튀어 검어지고, 나쁜 친구를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이 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은 뭣보다도 먼저 나쁜 벗을 멀리하고 그 대신 어질고 착한 사람과 가까이 사귀라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 보면 ‘선우(善友)’라는 경구가 여러 번 나옵니다. 구도생활에 있어서도 그만큼 어질고 착한 친구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상응부 경전 45권에는 ‘반(半’)이란 법문이 실려 있다. 한문 번역으로는 잡아함경 27권에 ‘선지식(善知識)’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선우란 선지식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석가족이 살고 있는 어떤 마을에 부처님이 머물고 계실 때, 시자인 아난가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선량한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은 길의 반(半)에 이른 거나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착한 벗은 이 길의 전부니라.”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선우(善友)로 삼았기 때문에 늙지 않으면 안 될 몸이어서 늙음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인간이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좋은 벗을 가지고, 착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은 이 길의 전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이 길’이란 더 말할 것도 없이 수행의 길이지만 보다 널리 풀이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사입니다.


한 가정의 행불행도 따지고 보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와 부모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외부적인 여건이 풍족하게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부부 사이에, 혹은 부모나 자녀들 사이에 신의와 존경과 사랑이 없다면 그 집안은 차디찬 의무만 남는 빈 꺼풀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비록 가진 것은 적더라도 서로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으로 다져진 가정이라면 늘 잔잔한 기쁨이 배어날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에서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이와 가까이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할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하셨습니다.


유유상종. 사람은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계꾼은 계꾼끼리, 도박꾼들은 도박꾼들끼리, 말 많은 사람은 말많 은 사람끼리, 말 없는 사람은 말 없는 사람끼리, 예절과 신의를 갖춘 사람은 또한 예절과 신의를 갖춘 사람은 또한 예절과 신의를 갖춘 사람끼리... 그가 사귀는 사람을 보면 바로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니까요. 


“나그네 길에서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말라.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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