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만다라, 진리의 본질 가르키는 법신 대일여래의 경지

페이지 정보

호수 292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3-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3-08 16:02 조회 133회

본문

만다라, 진리의 본질 가르키는 법신 대일여래의 경지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6. 만다라(曼茶羅)의 기초지식(基礎知識)


이 세상(현세現世)을 한마디로 표현(表現)하기는 극(極)히 곤란(困難)하다. 마찬가지로「만다라(曼茶羅)」라고 하는 의미(意味)도 한마디로는 좀처럼 표현하기 어러운 것이다. 일반에게 알려지고 있는 의미는 인도(印度)의 산스크리트어의「만다라」를 한음(漢音)으로 음역(音譯)한 것이「만다라(曼茶羅)」라고 한다. 

만다(曼茶)는 본질(本質) 또는 심수(心髓)이고 라(羅)는 얻는다는 해석으로서 ‘본질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본질(本質) 그 자체(自體)’ ‘일체제법(一切諸法)을 구족(具足)한 것’ 이라는 오리(悟理)의 경지(境地)를 표현한 하나의 세계를 목전(目前)에 제시(提示)한 것이 된다. 이러한 경우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經典)의 주석(註釋)에 의하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본질(本質)’로서 얻어진 경지는 이 이상 없는 우승(優勝)하고 순정(純正)한 것이며 평등원만(平等圓滿)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다라는 평면(平面)이지마는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앞에서 입체(立體)가 되고 피가 통(通)하고 있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구경(究竟) 보는 자(행자行者)와 보이는 측(側-만다라)의 상대적(相對的) 관념(觀念)은 생명(生命)에 의하여 관계(關係)가 맺어져서 길러져(육성育成) 가는 것이다.

잘 관찰하면 무량(無量)한 복지(福智)의 공덕(功德)이 취집(聚集)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身), 구(口), 의(意)의 삼밀(三密)이 원만(圓滿)하게 지배(支配)하고 있다. 즉 그 원만(圓滿)함을 우주간(宇宙間)의 신체상(身體上), 언어상(言語上), 정신상(精神上)의 모든 활동(活動), 다시 우주(宇宙) 그것의 경지(境地)를 떠나서는 절대로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본질적(本質的)인 것을 의미하는 보리(菩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경지(境地)다.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구석구석까지 대일여래(大日如來)를 떠나서는 존재(存在)하지 못한다. 우주(宇宙)가 곧 대일여래의 자체(自體)인 것이다. 왜냐하면 대일여래의 삼밀(三密)은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시방(十方)에 편만(遍滿)하여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삼밀이 원만(圓滿)하다 함은 만다라에 무수(無數)한 불보살(佛菩薩)이 시현(示現)되어 있는 것이다.

만다라(曼茶羅)라고 하는 무대(舞臺)는 석존(釋尊)만이 깨달음의 경지(境地)에 들어가는 특정(特定)한 좁은 장소(場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종자(種子-보리심)를 가지고 더욱 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인정(認定)하는 세계다.

다른 방향(方向)으로 보면 이 감각(感覺)을 마음에 머물게 한 것이 자성만다라(自性曼茶羅)다. 자성(自性)이라 함은 마음속에 비장(秘藏)한 인간의 무한(無限)의「에너지」이며, 깨달음이란 이렇게 가장 순화(純化)된 에너지가 완전 연소(燃燒)될 때에 일어나는 일찰나(一刹那)이며 하나의 정적(靜寂)이다.

 만다라(maṇḍala)는 밀교를 대표하는 예배의 대상이자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관상수행의 매개이다. 밀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술이기도 하다. 어원으로 보면 원을 뜻하는데, 모나거나 빠진 것 없는 완전한 형상으로 우주, 진리,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진리의 본질을 가리키니 법신 대일여래의 경지를 뜻한다. 

 지금은 티베트불교의 영향으로 만다라의 이름과 모습이 꽤 알려져 있고, 심리치료와 컬러링으로 소개되면서부터는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친근하게 접하고 있지만 불과 1~20년 전만 해도 아주 낯선 존재였다. 소설과 영화로 선보인 ‘만다라’로 이름 정도 알고 있는 게 거의 전부였다.


 깨달음의 세계란 말이나 형상 등 그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법문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설명해주셨고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선사 스님들도 수많은 법문과 어록으로 마음법을 일러주었다. 또한 자칫 우상화되거나 신비화, 관념화될 수 있는 우려가 있음에도 불보살상을 조각하고 각종 탱화와 만다라를 조성했다. 스승의 가르침과 원력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자 우리가 가야하고 이루어야 할 목적지를 똑똑히 보고 새기라는 뜻일 것이다. 특히 진리의 세계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형상화한 만다라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건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만다라에 대해 알지 못했음에도 만다라 그리기를 심리치료 분야에 도입했다는 점이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서 한 발 나아가 집단 무의식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강렬하고 자유로운 어떤 존재가 있다고 했다. 그가 심리학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고 하지만 만다라 그리기는 우연히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둥근 원을 그리고 마음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형태와 색상을 그려넣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심리치료기법을 만들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르는 마음의 이미지를 그려 자신의 정신적 변화를 관찰하면서 찾은 방법인데 나중에 만다라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이를 만다라라고 명명했다. 마음 깊숙이 묻혀있던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길을 만다라에서 찾았으며, 이것이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했다. 비단 만다라뿐 아니라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 세계 수많은 원상의 문양은 인간 정신의 중심이자 개인의 참다운 본래 모습을 상징하고 통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융의 심리치료기법이 만다라의 의미와 너무 많이 닮아있어 놀랍다.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닦는 선정수행은 전통적으로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여 마음을 챙기는 호흡법, 불보살님의 명호나 진언을 염송하는 염불법, 불보살상과 만다라를 관하는 관상법,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법이 대표적이다. 관상법은 16관법 등으로 제시되지만 불보살상과 만다라를 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상수행은 불보살상이나 만다라를 바라본 다음, 그것을 안으로 깊이 관조한다. 상을 매개로 진리의 본질과 나의 참된 본성을 관하고 마침내 나와 부처가 하나 되는 즉신성불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원정대성사는 그렇게 합일되는 것이 자성 만다라이고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자성이라 말씀했다. 그것이 곧 불성일 것이다. 아울러 깨달음의 경지는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이 아니고 우리 모두 다다를 수 있는데 그것이 만다라를 통해 가능하다고 했다.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평면이 입체가 되고 피가 통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강조했다. 

 가슴 떨리는 말씀인 건 분명하지만 수행력이 일천한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그저 만다라 관상수행이 마음을 그처럼 바꿀 수 있게 해준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복과 지혜가 응집되어 있고 신구의 삼밀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는 만다라. 좁고 편협한 마음을 우주와 같이 드넓은 세계로 확장하고, 모나고 강퍅한 마음을 둥글고 원만한 마음으로 가다듬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만다라를 응시하고 고요히 마음 안에 담아보자. 만다라라고 하는 아름다운 무대에서 평등원만하고 순정하고 수승한 찰나의 순간을 만나기를 꿈꾸어 본다.


* 카를 구스타프 융의 만다라 그리기에 관하여 월간 『불교문화』 ‘만다라 그리기로 참다운 자기를 찾을 수 있다 - 심리학자 융과 만다라 명상 (문진건)’을 참조하였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