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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부처님 가르침 대면하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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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읽는종조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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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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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2-07 15:23 조회 1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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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부처님 가르침 대면하는 기회

윤금선 작가와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5. 밀교(密敎)의 삼륜신(三輪身)

불의 권속(眷屬)은 대별(大別)해서 불(佛), 보살(菩薩), 명왕(明王)의 세가지다. 그런데 밀교는 현교와 달라서 문자불(文字佛)인 범자(梵字)를 관(觀)하고 진언을 염송하여 삼밀관행(三密觀行)을 주(主)로 하는 진실법(眞實法)이기 때문에 특히 명왕의 활동이 현저(顯著)하다.

삼륜신이란 자성륜신(自性輪身)과 정법륜신(正法輪身), 교령륜신(敎令輪身)을 말하는 것인데 자성신(自性身)은 불위(佛位)이므로 지비이덕(智悲二德)을 갖추었고 정법신(正法身)은 보살위(菩薩位)이므로 자비(慈悲)로써 섭수(攝受)하며 교령신(敎令身)은 명왕위(明王位)이므로 지혜(智慧)로서 절복(折伏)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佛) 법(法) 승(僧)을 비방하고 교단을 해(害)하거나 제도(濟度)되기 어려운 강강(强剛)한 중생이 있으면 이 교령신(敎令身)이 발동(發動)하여 항복(降伏)을 받는 것이다. 원래 명왕은 불법의 수호신(守護神)이기 때문이다. 

여기 삼보(三寶)를 해(害)하면 안되는 전설(傳說) 몇 가지를 보면,

신라 말경에 밀교수행승(密敎修行僧)인 청대사(鯖大師)가 길을 가다가 청어(鯖魚)를 말에 싣고 가는 마부(馬夫)를 만났다. 대사는 마부에게 청어 한 마리를 달라고 했으나 마부는 거절했다. 그러자 몇 걸음 가다가 말이 걸음을 멈추고 가지 못했다.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부는 느낀 바가 있어서 대사에게 청어를 바쳤다. 대사는 그 청어를 바다에 방생하자 죽었던 청어가 모두 살아서 고리를 치며 갔다는 것이다.

또 위문장자(衛門長者)라는 사람은 재산은 많으나 탐욕(貪慾)이 많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어느 때 밀교 수행대사가 여러 번 그 집에 탁발(托鉢)하러 갔으나 갈대마다 쫓겨나고 칠일째 갔을 때는 대빗자루로 치려고 할 때 대사는 손에 들었던 바루로 그를 막았다. 그러자 바루는 여덟 조각으로 부수어 져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그 익일부터 장자의 아들 여덟 형제는 차례로 죽어갔다. 장자는 그 탁발승(托鉢僧)이 훌륭한 대사임을 깨닫고 찾아서 참회(懺悔)하려고 결심하고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장삼암(杖杉庵)에서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에 대사가 나타나서「죄업(罪業)도 이제는 다 소멸되었으므로 무엇이든지 소원(所願)이 있으면 되도록 해줄 것이니 말하라」하였다. 장자(長者)는「우리 집은 호족(豪族)의 집안인데 이제 대(代)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대(代)를 잇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다. 대사는 작은 돌에「위문장자재래(衛門長者再來)」라고 써서 왼손에 쥐어 주었다. 그 후에 위씨(衛氏) 문중(門中)에 남자가 태어났으나 왼주먹을 쥐고 펴지 않으므로 석수사(石手寺)에 가서 손 펴기를 불공했다. 그러자 왼손이 펴지고 작은 돌을 쥐고 있었다.

또 수학여행 중 사찰근처에서 한 학생이 돌로써 석불의 눈을 맞히고 다음날 산으로 올라 가다가 앞 사람이 숲속 나뭇가지를 잡았다 놓는 바람에 그 탄력(彈力)에 뒷사람의 눈이 맞아 그만 실명(失明)하고 말았는데 그 학생이 바로 어제 석불(石佛)의 눈을 맞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삼보(三寶)를 해하는 과보(果報)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으나 열거하기 어렵다.


세상 만물 부처님 아닌 존재가 없고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고 하지만 어리석은지라 보고도 알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연은 이유 없이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연유를 알지 못하니 좋다, 싫다, 따지기에 급급하다. 좋으면 좋아서 들떠 있다가 흘려보내고, 나쁘면 나빠서 피하고 원망하느라 정신없다. 만나는 인연이 모두 부처님과 보살님과 명왕신이 우리를 깨우치려는 갖가지 방편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부처님법을 만나고 익히는 과정은 저마다 다르다. 고준한 경전말씀과 우레와 같은 법문으로 지혜를 얻기도 하고, 예불소리, 풍경소리, 스승의 자애로운 미소에 이끌려 가슴이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이 온전히 자신의 문제로 체화하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린다. 좋은 말씀이고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여기면서도 자신의 삶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바빠서 흘려듣고 어려워서 제쳐둔다. 버리라 하고 내려놓으라 하니 사실은 좀 불편하고 싫을 때도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아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아가곤 한다. 

그럴 때 역경은 부처님 가르침을 온몸으로 대면하는 기회다. 나만 알고 잘난체하며 욕심내고 화내며 앞만 보고 가다가 넘어지고 보면 문득 이게 뭔가 싶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주저앉아 넋 놓고 있다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차츰 나와 타인과 세상을 돌아보게 된다. 속상해하고 억울해하고 분노하기만 하면 어찌어찌 난관은 지나갈지 몰라도 남는 건 없다. 

그러나 부처님과 보살님과 명왕신의 당체법문으로 받아들이면 자신의 잘못을 찾고 업을 바꾸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걸림돌에 불과한 돌부리도 옆으로 치워놓으면 문제가 되지 않고 발판으로 삼으면 디딤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부는 그만큼 익을 것이고 삶은 훨씬 밝은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잊고 있거나 모르고 있었던 하나의 진실을 깨우치는 기회로 삼는 건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그럼에도 가장 믿기 힘든 것이 현재 일어나는 역경과 고난이 나로 인해 일어났다고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심으면 그 결과가 확연히 보이지만 우리들의 인생사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픈 것만 해도 그렇다. 소소한 감기나 피부, 관절, 치아 손상과 같은 경우에는 바이러스 때문에, 넘어지거나 삐끗해서, 혹은 피로가 쌓이거나 무리했거나 관리가 소홀해서 그렇다고 알 수 있다. 하지만 암과 같은 큰 병은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과도한 음주와 흡연, 잘못된 식습관, 가족력, 환경오염, 스트레스 등 수많은 가능성을 열거하지만 변수도 많다.

삶은 더하다. 타고나기를 가난하거나 병약한 것도 그렇고,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관들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누군가의 부주의로 엉뚱하게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잘못된 사회구조와 부도덕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기 일쑤인데 그것이 모조리 내 탓이라고 한다면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함부로 ‘당신의 업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몹시 거북하다.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타인의 불행에 대해 ‘전생’을 운운하고 섣불리 ‘인과응보’라고 결론짓는 건 너무나도 부당하다. 명백한 인과관계가 있고 분명한 가해자가 있을 때는 사뭇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부처님과 같은 불지견을 갖추지 못했기에 우리에게는, 타인의 간난신고를 판단한 능력도, 자격도, 없다. 아무런 혜안도 없으면서 어줍지 않게 전생과 현생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하고 금해야 한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볼 때는 아주 유용하다. 환경을 탓하고 남을 탓하면 당장은 편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상황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풀리지 않는다. 온전히 환경 때문이거나 언제나 남이 문제인 경우는 없다. 설사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해도 그것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도 나를 바꾸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남을 바꾼단 말인가? 그럴 때 가장 쉬우면서도 즉각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나를 돌아보고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요인들 가운데 최소한 자신에게 국한된 문제만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듭되다 보면 스스로의 능력이나 인격이 달라질 것이고 상황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영역도 확장될 것이다.

과거의 업을 너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철저히 준비하지 못해 기회를 놓친 건 아닌지, 야멸차게 대했기에 돌아오는 대가도 야박한 건 아닌지 최근의 모습만 살펴봐도 충분하다. 괜스레 막연하고 알 수도 없는 전생의 업을 따지느라 가까운 인연과보를 놓치고 있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원정대성사는 다른 무엇보다 삼보의 공덕을 훼손하는 언행을 삼가라고 강조하셨다. 삼보의 은혜와 가피를 단지 본인이 모르고 있을 뿐인데 공덕이 없다고 하고 비방까지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겪어보지 못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헛된 소리를 하는 것은 비단 삼보의 은혜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은 한둘이 아니다. 

모든 법문은 바로 나를 일깨우기 위한 가르침이고 모든 인연은 오직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불보살님의 진실한 현신임을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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