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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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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10-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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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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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10-10 15:13 조회 3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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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의 명과 암

한국의 근대화냐 식민지 수탈이냐의 혼돈

무분별한 수용으로 전통종교 불교의 위축


바티칸박물관에 소장 중인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은 서기 20년경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조각한 작품으로 로마 미술의 손꼽히는 걸작에 해당합니다. 개선장군의 옷을 차려입고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제국의 영광을 선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이 흰 대리석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독일 뮌헨대학교 고고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빈첸츠 브링크만에 의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채색되었던 사실이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입증됩니다. 이전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부분적으로 채색된 채로 발굴되었지만 무시되어왔었습니다. 왜 고대 그리스 조각이 채색되었다는 사실이 그처럼 부정되었을까요?


그리스·로마 조각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었던 조각상들은 1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탈색한 상태였고 남아있던 색상들도 발굴 과정에서 빛과 공기에 노출되고, 흙을 털어내는 청소 과정까지 거치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1489년 로마시대 대리석 조각으로 가장 이상적인 비례미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아폴로 벨베데레’가 로마에서 색이 다 벗겨진 흰색 조각으로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각상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로마 조각상들은 본래 흰색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죠. 이후 조각은 채색되지 않은 흰색 대리석으로 마무리되는 흐름이 정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에서 독일의 미술사가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 Joahim Winckelmann. 1717~1768)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라고 언급했고 괴테는 “야만인이나 무식한 사람, 어린이들은 선명한 색을 좋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에는 심지어 조각상에 물감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채색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돼도 “그리스가 등장하기 전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당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침략하여 식민화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그들은 견문이 넓어지면서 자신들이 피부가 상대적으로 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을 피부의 색깔을 기준으로 백인과 유색인(有色人)으로 나누었습니다. 


서양의 학자들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미술이 이집트 등 다른 문화권의 미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흰색 조각상을 그 증거로 여겼던 것이죠. 이제 미술을 넘어 문명화(文明化)의 정도를 기준으로 선진과 후진, 미개로 구분하여 후진과 미개지역을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합니다. 문명화는 곧 근대화였고 그 내용은 서구화였던 것입니다. 이제 전 세계는 정치와 경제 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서구문명의 내용으로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일본이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구화되자는 이 주장은 자신들의 전통을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면서 20세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국학(國學)이 크게 발전합니다. 일본 전국에 세운 제국대학에 인도철학과 불교를 연구하는 학과를 두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여 서구사회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전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은 근대화에 실패하였고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자신들의 전통을 부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은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실시한 철도와 도로와 항만 건설과 같은 근대적 문물의 보급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한 한국인들은 근대화로 인식하는 사람과 수탈을 효율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일본에 협조하여 상대적으로 부와 지위를 차지한 계층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제의 수탈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던 일반민들은 식민지 수탈론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재빠르게 친미로 변신합니다. 일본의 배후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주장이 놓여있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서구화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일본보다 자신의 전통을 애써 외면하고 서양문명을 일상의 수준에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전통종교인 불교가 심하게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 일본처럼 자신의 전통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가 전통문화를 근대화시켰던 일본과 달리 한국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서구 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이라면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한국은 왜 일본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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