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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와 윤회 그리고 해탈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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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9-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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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박희승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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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9-09 15:26 조회 4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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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로 여는 삶 (17회)

인과와 윤회 그리고 해탈의 지혜

근래 어느 암자의 노스님이 ‘윤회는 없다’는 주장을 해서 불교계가 시끄럽다. 세상은 늘 시끄러운 곳이나 고요해야 할 불교계가 ‘윤회’에 대한 견해 문제로 설왕설래하니 안타깝다. 

그렇지만,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보다는 부처님 법에 대한 탁마는 좋은 일이다. 이 시비를 스스로의 정견(正見)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가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자라면 다 아는 바와 같이 윤회설은 부처님이 최초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전생과 내생이 이어진다는 생사윤회는 부처님 이전에 인도의 브라만교의 가르침이었다. 


윤회와 해탈의 가르침, 불교

부처님 당시에도 윤회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인도의 브라만교는 네 가지 신분의 카스트라는 사회 계급제도를 만들었다. 브라만은 제사장의 최고 계급이 되고 그 아래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농사와 상업 등 경제활동을 하는 바이샤, 그리고 최하층 계급이 수드라이다. 네 계급은 부모에 따라 결정되었고, 평생 그 계급으로 살아야 하는데, 전생에 지은 과보(果報)로 금생의 몸을 받았다고 가르쳤다. 당시 인도의 지배계급인 브라만교는 이러한 인과 윤회설을 철저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사회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운명론적인 윤회설에 의문을 품고 영원한 대자유를 찾아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도를 통해서 중도의 깨달음 성취하고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 열반하는 길을 찾았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佛敎)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윤회설을 수용하였지만, 그들처럼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宿命論)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길을 가르쳤다. 더 나아가 카스트라는 세속사회의 대안으로 승가라는 불교 공동체를 창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회가 불교 근본이라는 주장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설한 방대한 팔만대장경에는 윤회와 동시에 해탈의 길이 설해져 있다. 그럼에도 근래 남방에서 공부하고 온 일부 수행자들은 ‘윤회가 불교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윤회가 불교의 근본이라면 브라만교(힌두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경전에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해탈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러니 깨달음, 해탈이 불교의 근본이지 윤회를 근본이라 함은 불교의 정견이 서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견해는 ‘나’가 있고, 내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수행하는 잘못된 생멸(生滅) 연기관에 근거한 것이다. ‘생멸 연기관’이란 부처님이 깨치고 설하신 연기법을 존재원리로 보지 못하고 생멸원리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나와 세상 만물을 생멸 현상으로 보게 되면 ‘나와 법이 있다’는 상견(常見)에 떨어진다고 부처님은 경계하셨다.  


인과 부정으로 여우가 된 수행자

한편 이번 노스님처럼 윤회를 부정하는 불자들도 적지 않다. 선종의 유명한 ????백장록????에는 인과(因果)를 부정하여 여우 몸을 받은 수행자 이야기가 나온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잘못 말했다가 그 과보로 축생인 여우의 몸을 받았다. 그 수행자는 훗날 도인 백장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수행을 많이 한 이는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고 말해 주었다. 

이와 같이 인과와 윤회를 없다고 부정하는 이를 불교에서는 단견(斷見)이라 하고, 나와 윤회가 있다고만 보면 상견(常見)이라 한다. 단견과 상견은 대립하는 양변에 치우친 삿된 견해이다. 이것은 중도 정견이 아닌 것이다. 

불교는 중도가 근본이다.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은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다. 나와 나의 것이 실체가 없는 연기, 무아라는 정견을 세운 불자라면 지혜가 나와 생사윤회를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박희승 / 불교인재원 생활참선 지도교수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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