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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존승다라니 염송의궤의 오대서원 정진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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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9-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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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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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9-09 14:25 조회 4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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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존승다라니 염송의궤의 오대서원 정진수행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2. 정통밀교는 조직과 체계를 갖춘다.


  (앞 호에 이어) 밀교는 의궤(儀軌)를 준수(遵守)하고 염송을 줄이거나 진언을 남용(濫用)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존재는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불이라든가 위급(危急)한 경우에 무의식한 가운데 무거운 가재도구(家財道具)를 혼자 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 체력(體力)이 자기도 모를 정도로 잠재력(潛在力)을 갖추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운동선수는 훌륭한 코치와 엄격한 훈련에 의해서 잠재적인 체력을 개발(開發)할 수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조건(絶對的條件)이 바른 코치와 규율(規律)있는 훈련을 위반(違反)했을 때에는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구(不具)가 되거나 생명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정신력(精神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학교교육도 직업교육도 잠재적인 개인의 능력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다. 문자(文字)를 모르는 미개사회(未開社會)의 사람이 문자를 볼 때 이상하지만 알고 나면 당연한 것으로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평소 모르던 것도 시험공부를 할 때는 모두 기억해 버린다. 이것은 정신을 집중(集中)하여 두뇌(頭腦)를 유효하게 사용하는 까닭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도 이 방법을 쓰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연습(練習)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체력개발(體力開發)에 그 방법이 잘못되면 불행을 초래하듯이 정신력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층 더 위험이 수반(隨伴)된다. (축지縮地, 취물取物등) 밀교의 근본성전(根本聖典)인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대일경大日經) 밀인품(密印品)에서는 월삼매야(越三昧耶)가 엄중하게 금지되어있다. 삼매야(三昧耶)라함은 산스크리트어의「사마야」의 음사(音寫)로서 이 원어(原語)는 정즉(定則), 약속(約束), 규정(規定), 규율(規律)이라는 뜻으로서「어디서 만나자」는 약속도 국가의 법률도 모두「사마야」지 마는 여기서는 불타(佛陀)의 서원(誓願)을 말한다. 밀교의 규정에 어긋나는 무자격자(無資格者)에(방불자謗佛者)비법(秘法)을 누설(漏泄)하면「사마야」에 위배되어 월삼매야(越三昧耶)가 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열기(劣機)가 법을 듣고 감당하지 못하면 당자의 신체적 파멸(破滅)은 물론,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폐를 끼쳐서 법을 비방하기 때문이다.(방불수고謗佛受苦) 괘테의 사기시(事記詩)의 일예를 들면 ‘마술(魔術) 쓰는 제자(弟子)’라는 것이 있다. 어느 날 마술사가 집에 없는 사이에 제자(弟子)가 마술을 사용하여 빗자루에게 물을 길러오라고 명했다. 빗자루는 냇가에 물을 길러오기 시작하여 물이 통에 찾는데 그만 두라는 주문(呪文)을 몰라서 중지(中止)시키지 못하고 빗자루는 자꾸자꾸 물을 길러왔다. 제자는 다급하여 도끼로 빗자루를 두 토막을 내었으나 빗자루는 두 개가 되어 배로 길러오니 집은 홍수(洪水)가 졌다. 제자가 비명을 지를 쯤에 마법사가 돌아와서 정지시켰다. (주술呪術, 축지縮地에 퇴신 못함과 같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원자력(原子力)을 개발하여 그 이용에 성공하였으나 그 결과는 많은 인간을 파멸에 빠뜨렸다. 정신력개발의 가능성은 무한하나 선량한 바탕위에서 개발이 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자타가 모두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밀교는 항상 오대서원을 가지고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소재오대서원(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所載五大誓願)) 수행(修行)하게 된다.


불정존승다라니 염송의궤의 오대서원 정진수행


 밀교에서는 의궤를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본래 부처님 법신임을 증명하는 방편이자 바로 지금 이 몸으로 보살의 삶을 구현해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신구의 삼밀의궤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지켜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밀교의식에 대한 설명에 앞서, 염송을 줄이거나 진언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길게 예를 들고 있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누구에게나 잠재해있는 무한한 육체의 능력과 정신력에서부터 오남용 되고 있는 아주 흔한 사례들이 자세히 설명되는 데다 심지어 괴테의 마술 이야기를 예로 들고 마침내 자연을 개발하고 원자력을 개발하였지만 그것이 인류를 파멸에 빠트리고 있다고 경고하는 데에서 당혹감은 커졌다. 원정대성사께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구체적이고 자세히, 거듭 경계하는 것일까?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넘겨짚는 경우는 흔하다. 공의 가르침만 해도 그렇다. 듣는 순간 허무하다는 생각부터 들고, 세상만사 덧없고 의미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업이라는 가르침도 비슷하다. 업장 운운하며 내가 됐든 상대가 됐든 손쉽게 누군가를 탓하거나 지나온 과거 탓으로 치부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기 일쑤다.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고 모두들 자기를 챙기며 사는데 무아라니,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싫다. 그러니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심지어 동체대비라는 데에 어찌 공감할 수 있으랴. 다 하기 좋은 말이고 도덕 교과서 내지 종교에서나 하는 이상주의자의 말로 치부하게 된다. 이제 막 계단 입구에 서서 저 높이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어렴풋이 듣고 제 나름대로,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인도불교와 밀교의 전통을 원형 그대로 계승하고 구현해온 티베트 불교에서는 <입보리행론>, <보리도등론>, <보리도차제론> 등을 중요시 여기는데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단계적인 공부와 수행이다. 그 곳의 승려교육은 최소 16년이고 박사 학위라 할 수 있는 게쉐까지는 20년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궁극의 도인 탄트라를 증득하기까지 경전공부는 물론 통찰과 수행을 순서대로 체계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에 오시교판론이 있다면 티베트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로 나눈다. 부처님의 법문을 근기와 상황에 맞는 대기설법이라 하고 수준과 단계에 따른 차제설법이라 하는 것도 같은 이야기이다. 가르침을 듣는 이가 누구이고 어떤 상황이며 어떻게 공부했고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따라 가르침은 달라진다. 


 불교의 교리와 사상도 이럴진대 보살의 몸을 갖추고 금강법신을 이루기 위해 닦는 수행의궤법은 더더욱 설명하기 어렵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먹고 살기 바쁘고 눈앞의 일들로 허덕이는 이에게는 진리라든가 중생구제는 머나먼 남의 일일 수밖에 없다. 당장 고통 없이 잘 사는 방법이 궁금할 뿐이다. 이 생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속제법이 귀에 먼저 들어온다. 선행을 베풀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닦으려는 것만 해도 거칠고 욕심 사나운 이 세상에서 대단한 선근이다. 


 일시적이고 상대적일지라도 소박한 행복을 위해 절제하고 베풀며 살다보면 어느 날인가 문득 욕망과 분노와 번뇌의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행복은 가지려는 데서 찾아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마음자리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진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완전한 해탈을 꿈꿔보기도 한다. 나와 가족이라고 하는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야가 확장되고 연민의 마음이 커져간다. 무아, 공성, 그리고 중생구제와 깨달음을 향한 보리심과 보살행원에도 마음이 가닿는다.

  

 보살의 삶을 살고자 할 때 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내 욕심이 아니라 보살행과 원력행을 성취하기 위해 전혀 다른 의미로 몸을 소중히 여긴다. 그럴 때라야 몸과 입과 마음의 삼밀이 하나 되는 수행의궤를 사심 없이, 오염 없이, 오차 없이 닦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정대성사께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면, 의궤수행으로 얻어지는 조금의 성과도 본인과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 불행과 폐해를 막기 위한 근간은 오대서원이다. 오대서원을 항상 간직하고 수행하라는 말씀을 잊지 말자. 


윤금선 (BBS 「무명을 밝히고」 「거룩한 만남」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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