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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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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8-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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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8-01 15:43 조회 5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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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훌륭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다시 말해 세계관이 다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인간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이견들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이는 곧 사회가 건강하고 시민의식이 성숙했다는 뜻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자기의견과 주장을 펼치는 자유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에는 일정한 한계와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과 논쟁에는 ‘꼭 있어야 할 한계와 책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극한으로 내달리며 마치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익 대립이나 극렬한 진보, 보수의 다툼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야말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살펴보고, 자기 나름의 관점과 철학에 따라 옳다 혹은 그르다고 판단을 내리고 밖으로 주장을 펴는 성숙함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또는 우리가 저 편을 꺾어야지, 무너뜨려야지, 아예 죽여 버려야 돼 !”하는 식의 전쟁터와 같은 살벌함까지 보입니다.


어느 날 사리풋타 존자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인간이 가진 더러운 속성’과 ‘그에 따르는 수행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구들을 가르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 자기 안에 더러움이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둘째 자기 안에 더러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고치려는 사람, 셋째 자기 안에 더러움이 없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 넷째 자기 안에 더러움이 없음을 알고 앞으로도 더러움이 끼지 않도록 단속하는 사람을 말하느니라. 이 중에서 더러움이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더러움이 없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천한 사람이다. 그러나 더러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는 사람과 더러움이 없음을 알고 더러움이 끼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사람은 수승한 사람이니라.” 


이때 어떤 비구가 일어나서 사리풋타 존자에게 궁금한 사항을 여쭈었습니다.


“존자여, 왜 어떤 사람은 더러움이 있는데도 수승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더러움이 없는 데도 하천하다고 하십니까?” 


“더러움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또 더러움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더러움이 끼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부지런히 닦으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하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자신에게 더러움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더러 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므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수승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존자여, 그러면 무었을 가리켜 더러움이라고 합니까?”


“욕심에서 생기는 나쁜 행동을 더러움이라 한다. 예를 들어 계율을 범하고도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기 바라거나, 남이 알게 되면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화를 내고 좋지 않은 마음을 품거나, 자신만이 부처님께 질문을 드리고 또 부처님께서 자신만을 위해서 좋지 않은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더러움이오. 그러므로 수행자라면 항상 이와 같은 더러움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느니라.”


만약 우리들이 사리풋타존자의 가르침대로 자기의 더러움, 단점이나 결점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현상을 둘러싸고 ‘전쟁과 같은 살벌함’이 벌어질까요? 위의 내용을 요즈음 말로 바꾸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법률이나 윤리,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도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남들이 모르기를 바라거나, 혹 남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며,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 하거나, 재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지적하면 공손하게 받아들이지만 반대로 자기보다 힘이 없는 사람이 잘못을 지적하면 화를 내며 불쾌해하거나,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심지어 세상을 원망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단점과 결점이라고 합니다. 이런 단점과 결점이 없는 사람, 그리고 혹 단점과 결점이 있지만 ‘내게 이런 잘 못이 있다’ 고 살펴 알면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몰라 무방비상태로 있거나, 자신이 잘못 행동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은 천박한 사람입니다.” 


내 주장만 옳다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부류에 속할까요? 사리풋타 존자가 언급한 단점과 결점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살펴볼 마음조차 없이 남의 약점을 찾으려고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에게 혹시라도 ‘훌륭하다’는 수식어를 붙여줄 수 있을까요? 문제는 이런 경향이 어느 한 분야에만 한정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널리 퍼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주장을 이해하고 사랑이 담긴 비판을 건네주는 자비심이 없이, 상대를 무너뜨리고 말겠다는 투쟁 의욕과 증오심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범했다 해도 거듭 되풀이해서는 안 되고, 악행에서 희열을 구해서는 안 되네. 악이 쌓이면 괴로울 뿐이니. 결과가 나한테 오지는 않을 거야’라고 하며 악에 대해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하리.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물독을 가득 채우나니,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악을 하나하나 쌓아서 자신을 악으로 가득 채우게 되네. 『법구경』


‘내게는 혹 잘못이 없을까?’ 자성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구성원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며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나는 잘못을 할리가 없어. 저 사람들은 항상 나빠!’라며 ‘남 탓하기’에만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마음을 살펴 알고, 자기 바깥 세상에 자비심을 품고 살아가는 평화의 화신이 되어야겠습니까? 한사람, 한사람이 평화로우면 세상이 평화로워 집니다. ‘심청정국토청정’이고, ‘일즉일체다즉일’입니다.         총기 35년 10월 <이달의 설법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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