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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길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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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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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2-07 14:34 조회 5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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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원정대성사일대기 (16회)

불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길과 만나다

 미군정이 뿌리를 내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사회는 또 한 차례 격동을 겪었다. 1948년 2월 소위 ‘2.7구국투쟁’으로 전국 단위의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소요 당일 밀양은 마침 장날이라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치적 소요의 바탕에는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깊이 깔려 있어 소동은 급격히 번져 갔다. 밀양 농민들은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모든 행정 업무가 마비됐다.

 이렇게 소요가 격해지자 밀양공립농잠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에 참여했다. 시위에 나섰던 많은 학생이 체포되는 일이 생겼다. 교육자로서 대성사는 깊은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소란을 진정시키고 또 한편으로 체포된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혼란이 계속된다 하여 스승의 역할과 태도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대성사가 후일 총지종을 창종하고 천명한 스승의 사명에서 관계를 스승과 학생으로 바꿔 살펴보면 당시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스승은 매일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과 만나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가장 앞자리에서 활동하므로 그 사명이 무겁고 커서 사회와 국가의 앞날을 좌우한다. 스승은 세상의 거친 흐름과 변화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며, 스스로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세워 그에 따라 생활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세상의 평판과 이해에 따라 무릎 꿇거나 흔들리지 않는 지조와 정의에 투철한 모범적인 스승이 되어야 한다.”


 이 모습을 당시 대성사의 삶에 비춰보면 어떻게 학생들을 이끌고 가르쳤을지 짐작할 수 있다. 대성사는 좌와 우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공평무사함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양극단을 여의는 불교 중도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서로를 적으로 두고 대립해서는 결코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없다는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피하지 않는 태도는 하얼빈 시대 이후 지속해온 생활의 방침이었다.

 

 2.7 사태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100여 명이 숨졌고 8,500명 이상이 체포돼 투옥되었다. 대성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농잠 중학교 학생들의 피해는 최소로 줄일 수 있었지만, 더 큰 폭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국적인 파업과 봉기 사태가 진정된 것도 잠깐 사이,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도 4.3사건이 벌어졌다.

 시대는 피와 광기로 물들었다. 역사의 폭풍우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기억이 시작된 이후 대성사는 한순간도 편히 마음을 놓을 때가 없었다. 어린 걸음으로 망명길을 걸어 압록강을 건너야 했고, 독립 전쟁의 고초를 지켜봐야 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고향에서 멀리 떠난 이역의 땅에서 살아야 했다. 광복된 조국은 또다시 이념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미움과 원망을 겨누고 있었다.

 좌우 충돌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대성사는 평소 깊은 관심을 두고 있던 불교 경전과 교리를 더 깊이 연구하게 된다. 이념의 대립과 권력투쟁을 떠난 제삼의 길,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세속을 떠나 산중에 홀로 수행하는 그런 불교로는 과학과 문명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의 길잡이가 되지 못한다는 점도 깊이 깨달았다. 

 20세기 초에 불타오른 중국의 거사 불교 운동은 대성사가 그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데 큰 지침이 됐다. 불교가 더 이상 산중에 머물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실천은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대성사는 기복이나 은둔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구할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이념의 대립과 혼돈으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불교 경전과 책에 몰입했다. 좌우 어느 편에도 휩쓸리지 않고 학생을 대할 때는 스승의 위치를 잊지 않고, 누구나 인생의 물음을 구하려는 이에게는 답을 주었다. 밀양 인근에 대성사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져서 불교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이로 평판이 자자했다.

 

 혼란과 위기 속에도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분단된 남과북도 조금씩 나라의 꼴을 갖추어 갔다. 대성사의 외아들인 손순표도 성장해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다. 대성사는 새로운 조국의 인재가 되기를 바라며 아들의 상경길을 배웅했다. 

이 일이 후일 큰 파란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삶과 세상은 모두의 바람대로 풀리는 법은 아니라서 희망으로 시작한 일도 한없는 고통을 줄 수 있는 법이다. 인연과 인과는 깊고 묘한 법이다. 시국은 평온해 보였지만 남한의 정치 상황은 나날이 복잡해져 갔다. 남과 북의 갈등과 긴장도 깊어졌다. 밀양에도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간 사냥으로 이어졌다.

 대성사의 고향에서도 좌익으로 체포돼 야산에서 총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성사는 공무원이자 교사로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학생과 친지들에게 엉뚱한 일이 닥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 시류와 정국이 흘러가는 형국은 대성사가 밝힌 사물의 발전 법칙과도 흡사했다.


 “좋은 인(善因)과 좋은 연(善緣)이 만나면 좋은 결과(善果)가 생긴다. 좋은 씨앗을 비옥한 땅에 심은 것과 같다. 선한 인(善因)과 악한 연(惡緣)이 만나면, 우세한 편에 따라 결과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악한 인연이 만날 경우 당연히 악한 결과가 생긴다. 악한 인(惡因)과 선한 연(善緣)이 만날 때, 우세한 편에 따라 선과 악의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당시의 시국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서로 선을 주장하지만, 악과 만나 힘을 겨루다가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했다. 선악의 평판이 하루아침에 갈리는 일도 잦았다. 대성사는 결국 내 안의 선한 인因을 일으켜야 하고 밖으로 착한연緣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족과 주변에도 이런 이치를 늘 이르고 자중하고 시류에 휩쓸려 악한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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