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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희는 결심했습니다. 독립군에 나가 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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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5-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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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5-16 11:59 조회 8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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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대성사 일대기 (7회)

어머니, 저희는 결심했습니다. 독립군에 나가 싸우겠습니다

부친 손기현 8개월의 징역, 2016년 대통령 훈장 추서
체포된 대성사의 형, 고문으로 평생의 지병을 얻게 돼

“독립군인지는 모르겠고 굶주린 동포가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대성사의 부친은 즉시 안동 영사관으로 압송되었다.
대성사의 나이 13살 때의 일이다.
체포 당시의 상황은 대성사의 어린 여동생이 생전에 남긴 회고담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평소처럼 다수의 독립군이 들러 옥수수와 감자로 아침을 먹고 떠난 후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말 탄 기병대와 소총을 든 수십 명의 일본군이 일본 경찰과 함께 사립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총을 들이대고 독립군의 행방을 물었다.
일본군 우두머리가 말에서 내려 보며 물었다.
“독립군을 보았는가?”
대성사의 부친은 비웃으며 답했다.
“보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이 아니다.”
“알고 왔는데 시치미를 떼는 것인가?”
“독립군인지는 모르겠고 굶주린 동포가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간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집안을 부술 듯이 온통 뒤집고 샅샅이 살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자 대성사의 부친과 17살이던 형을 끌고 갔다. 대성사와 모친, 그리고 어린 여동생 둘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성사는 어린 탓에 변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마음 깊이상처가 남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는 폭력과 자비 없는 악행이 얼마나 사납고 두려운 것인가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헌병대에 끌고 가서 보름 동안 악랄한 고문이 이어졌다.
손톱에 바늘을 꽂아 넣고 집게로 손가락 관절을 모두 비틀었다. 거꾸로 매단 후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코에는 소금물을 쏟아 부었다. 피가 터지도록 몽둥이질을 한 후 정신을 잃으면 물을 뿌려 깨워 더 심한 매질을 하였다. 더 참혹한 것은 아비의 눈앞에서 자식을 고문하고, 자식에게 아비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오랫동안 밀정을 통해 대성사 부친의 활동을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의 부하로 독립단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서로군정서를 토벌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모질게 고문했던 것이다.
대성사의 부친이 입을 열지 않고 비밀을 지키는 사이 독립군들은 본부를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기고, 독립군 대부분도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절하여 체포된 대성사의 형은 고문으로 인해 평생의 지병을 얻게 된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아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자 형은 보름 만에 석방되고 부친은 신의주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죄목은 제령 제7조 위반. 일제로부터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았다. 손기현의 공적은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2016년 대통령 포상으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 또한 후손에게 알려지지 않아 묻혀졌는데, 다행인 것은 금번 일대기 작업 과정에서 독립운동 행적이 밝혀져 후손에게 훈장과 공적서가 전해지고 독립유공자로 정확히 기록되게 된 것이다. 옥고를 치른 것은 부친이었지만 모든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대성사도 가족도 모두 우리 광복의 치열한 씨앗과 빛이 됐다.
대성사의 형은 집에 돌아와서도 여러 날을 앓아누웠다. 현실은 더욱 잔인하게 닥쳤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형제가 고스란히 채워야 했다. 장을 보는 일부터, 독립운동가를 위해 멀리 가서 전갈을 전하는 심부름까지 형제가 번갈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멀리 떠나보내는 형제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대성사의 모친은 본디 불심이 깊었다. 남편이 옥고를 치를 때도 흐트러지지 않고 묵묵히 인욕으로 자리를 지켰다. 정의로운 일을 하다 불의한 이들에게 당하는 고초였기 때문에 보살심을 잃지 않았으리라.
새벽이면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간도땅 독립운동가의 아내들이 그랬듯이 점점 기울어 가는 가세를 안간힘을 다해서 버텨냈다.
어느 날 문득 대성사 형제는 어머니께 간청을 드렸다.
“어머니. 저희는 결심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어린 대성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도 독립군에 나가 싸우겠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모습이 한편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옥고를 치르고 있는 남편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고 있는데 너희마저 떠난다면 이 집안을 지킬 수 있겠느냐? 정의를 위해 나서는 것은 말리지 않을 것이나 아버지가 돌아오신 후에 결정하자.”
밀정들은 여전히 대성사 가족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폈고, 간간이 일본군 헌병들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동태를 살핀다고 들러 가족을 괴롭혔다. 환인현에서 버티는 일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대성사 부친은 8개월의 징역을 꼬박 살고 돌아왔다. 가계는 어려워졌으나 그렇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무장독립투쟁은 폭도로 몰고 군자금 모금은 강도로 몰아 처벌했다. 독립군이 잡히면 주로 강도, 살인범 등의 죄목으로 재판에 넘겼다.
손기현은 석방된 후에도 망명자 사회에서 상당한 존경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퉁화현의 한족회원이 독립군 군자금 모금의 와중에 밀정으로 의심 되는 이를 처결한 사건이 있었는데, 대성사의 부친은 체포된 이의 무죄를 주장하는 증인으로 나서서 일제에 맞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대성사의 신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자칫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국인 부자가 대성사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양자로 달라고 간청했다고 전한다.
당시 서간도 지역의 토지는 대부분 중국인 지주들의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부자가 대성사의 집을 찾았다. 대성사 부친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다짜고짜 요청을 했다.
“내 이집 둘째 아드님을 눈여겨보았소. 한눈에도 심성이 바르게 보이고 영민함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집 사정은 내가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으니, 이집엔 대를 이을 맏이도 있으니 둘째를 내게 양자로 주시면 어떻겠소? 내 필히 잘 가르치고 가진 것을 모두 쏟아서라도 크게 성공한 인물로 키우고 싶소.”
난데없는 요청에 대성사의 부모는 잠시 얼어붙었다. 자식의 미래가 달린 일이라 섣불리 결정할 수 없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내 멀리 이곳에 와서 망명생활을 하는 것은 민족과 자손의 미래를 도모코자 함이오. 어찌 자식을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천부당한 말씀이니 그 청을 거두시고 돌아가시오.”
그러나 중국인 부자는 순순히 뜻을 거두지 않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소. 이집 둘째는 큰 인물이 되어 세상에 이름을 떨칠 운명이오. 하지만 주변 도움 없이는 세상 누구보다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리다. 그러니 내가 맡아 순탄하게 큰사람으로 만들게 해주시오.”
그런 간절한 청에도 대성사 부모의 뜻이 완강하자 아쉽게 돌아섰다. 하지만 간혹 들러 대성사를 살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기를 즐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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