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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 비구니의 지위를 확립한 최끼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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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정성준 교수의 밀교 인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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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교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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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2-06 11:38 조회 1,6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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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 비구니의 지위를 확립한 최끼된마
딸을 잃은 슬픔으로 불교 심취 후 밀교 수행 시작 ... ‘금강무’ 전통재현으로 티벳불교 범패 부흥기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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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끼된마


티벳을 이끄는 달라이라마제도는 사바세계에 고통받는 중생이 단 한명이라도 남아있다면 결코 안락한 열반을 택하지 않겠다는 대승불교의 보현행원(普賢行願)에서 비롯되었다. 보현행원은 여러 생을 통해 인간계를 선택해 전생(轉生)할 수 있는 담보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번뇌에 의해 삼계를 전전하는 중생과 달리 무상유가딴뜨라의 수행자들은 12지연기의 관법을 의궤화한 생기차제와 구경차제를 수련하고, 현생을 마치고 입적하면 중음을 거쳐 인간계에 새로이 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티벳을 이끄는 종교지도자들은 원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전생한 최고의 밀교승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도 아쇼카왕의 비원은 달라이라마 제도에 의해 티벳에서 불교의 이상사회의 실현으로 새로이 태어났다. 티벳의 안정된 불교사회는 티벳인들이 밀교수행에 전념할 수 있게 함으로써 티벳에는 수많은 성취자들이 출현하였다. 티벳에는 여성성취자들도 적지않게 존재하는데 인도불교의 여성성불에 대한 확고한 교단의 기준은 밀교의 탄생과 더불어 마련되었다. 


초대 달라이라마 재세시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여성성취자로 유명한 분은 최끼된마(Chökyi Drönma, 1422-1455)이다. 옛적 티벳의 망율구탕지방에서 얄룽왕조의 왕인 티하왕곌첸왕(1404-1464)은 왕비 도데(mdo sde) 사이에서 아들을 기다렸지만 오직 공주만을 얻었을 뿐이다. 얄룽의 왕사(王師)는 공주로 하여금 공주로서 왕가를 계승할 준비를 했지만 몇 년 후 남부 봉족출신의 두 번째 비(妃)가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최끼된마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된다. 어린 시절 최끼된마는 즐거운 시절을 보냈지만 잔병치례를 겪었다. 명석한 머리로 일찍 어린 시절의 교육을 마쳤고 불교과목으로서 산스끄리뜨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러한 자질은 그녀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불교수행에 전념하게 될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438년 최끼된마는 17세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와 어머니는 구게왕조의 가문과 혼인하길 바랬으나 왕실 궁정의 결정에 의해 셸깔의 라또호 왕가와 결혼하는 정략결혼에 희생되었다. 라또호 왕가는 당시 티벳의 토속신앙인 뵌교를 신앙하고 있었으나 아버지로부터 배운 불심이 깊었던 최끼된마는 관여치 않고 뵌교의 사제들을 두렵게 했다. 19세때는 딸을 낳았을 때 왕가는 딸에게 뵌교를 가르치길 원했지만 최끼된마는 불교교육을 시키기를 권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끼된마가 온천에 가 있는 동안 불행하게 딸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한 심정적 변화 때문에 최끼된마는 양 왕가에 불교수행을 위해 출가할 것을 선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최끼된마는 셀깔에 소재한 포롱뻴모최딩사원에서 경전을 읽으며 불교에 대해 심취하였다. 마침내 출가할 것을 굳힌 최끼된마는 한밤중에 성을 넘어 탈출했으나 도중에 붙잡혔고, 시부모 왕가는 산발과 피떡이 된 그녀를 보고 마침내 굴복해 그녀의 불교수행을 허락하였다. 남편도 허락하여 새로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포롱뻴모최딩사원에서 스승이 딘 보동최끌남곌의 지도를 받았고, 출가한 후 법명을 ‘최끼된마’로 받았다. 당시 티벳사회에는 비구니 출가의 전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최끼된마의 출가로 큰 비난을 받았지만 스승은 감수하였다. 최끼된마의 전기는 그녀의 동학인 뻴치메둡빠에 의해 기록되었고, 여기에는 최끼된마가 수학한 내용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최끼된마는 티벳불교사에 여성출가자의 새로운 전통과 범패, 경전의 출판, 교육사업의 확대 등은 스승인 보동최끌남곌과 최끼된마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보동최끌남곌은 밀교에 대해 탁월한 견해가 있었고, 최끼된마에게 티벳에 밀교수행자로서 새로운 전통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인도불교의 전통에서 ‘금강무(金剛舞)’라고 하는 무상유가딴뜨라의 의식적 춤이 있었는데 티벳불교에 전해졌지만 랑달마왕의 폐불 이후 그 전승이 희박해졌다. 최끼된마는 금강무를 발굴해 비구니들에게 새로이 가르쳤다. 복장과 가면을 조성하고, 선험자인 델렉최덴의 인도로 16비구니에게 금강무의 전통을 재현했다. 전기에는 소작딴뜨라를 비롯해 4부딴드라와 관련된 모든 의식의 가무를 익혔다고 한다. 특히 가면을 쓰고 대중들 앞에서 의식적 춤을 선보인 것으로 보아 지역에 산실되었던 티벳불교 범패의 부흥이 이를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상유가딴뜨라의 금강무는 유가의 경지를 춤을 통해 몰입하는 출세간적 수행의 의미가 컸기 때문에 지금의 사회의 가무자원으로서 현재의 범패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이다.


최끼된마의 다른 인생의 전환점은 스승인 보동최끌남걀의 입적이었다. 1451년 스승은 자신의 열반을 예고하였다. 다비식에 의해 사리를 추출했다. 그녀는 깊이 상심하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 기거하면서 미친 자처럼 살았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해 스승의 전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최끼된마는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목각경판의 조성을 시도해 이후 티벳전역에 퍼지게 하였다. 또한 그녀는 관개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수로를 새로이 조성해 경작지역을 넓힘으로써 불교사원의 수도와 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후 최끼된마는 닝마빠의 스승 탕통곌뽀(1361-1464)를 만났다. 밀교의 주술과 예언에 탁월했던 스승은 최끼된마로 하여금 요기니로서 내면적 유가에 전념하는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최끼된마는 왕가의 인물로서 가정과 사회의 책임을 다하고, 티벳불교의 사회, 문화적 역할을 수행해 많은 기여를 했지만, 최끼된마의 말년은 수행에 전념하는 밀교수행자의 삶에 모아지고 있었다. 티벳에는 최끼된마 이전 마칙랍된(ma cig labs sgron, 1055-1149)이라는 유명한 여성 요기니가 있었다. 이후 티벳에 여성수행자로서 법맥은 단절되었다가 최끼된마로 인해 밀교 여성수행자의 전통도  부활되었다. 최끼된마는 인간으로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였고, 오로지 밀교본존과 요기니로서 궁극적 해탈의 성취만이 그녀의 목표가 되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녀의 풀어헤친 머리와 외떨어진 모습에 놀랐지만 그녀의 경지는 모든 것을 초탈한 요기니로서 자유로운 삶이었다. 전기에는 말년의 최끼된마가 거주 지역을 벗어나 시가체를 비롯해 여행한 지역과 방문한 인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끼된마는 라사를 방문하여 당시 쫑카빠(Tsong kha pa, 1357-1414)의 명성을 새로이 전해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최끼된마는 1455년 즈암 짜리짜공에서 세수 겨우 35세로 입적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1467년이라 전한다. 다비후 최끼된마의 머리뼈가 남았는데 탕통곌뽀는 짜리탕통의 성지에 특별한 두골사리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을 오래전에 했었다고 한다. 여성수행자이기 이전에 한 어머니로서 딸을 잃는 고통은 그 무엇에도 비하지 못한다. 최끼된마가 일으킨 불사나 티벳의 사회자원을 개발한 활동은 무수히 많다. 너무 나 재주가 많고 시대를 넘어 기발하였지만 머리를 풀어헤친 광기는 당대의 천재들이 보이는 흔한 모습이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결혼과 딸을 잃은 슬픔의 도피로서 밀교 수행자가 된 것은 그녀로서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모정의 단절이 그녀를 단명케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편에 서서 판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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