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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여실(如實)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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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2-01 신문면수 2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내 눈높이로 읽는 소의경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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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2-06 10:56 조회 1,4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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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대일경_주심품 (5회)

‘보리는 여실(如實)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

‘일체지지’는 괴로움을 없애고 갖가지 공덕을 낳게 합니다. 일체지지는 보리심(菩提心)을 원인으로 하고 대비(大悲)가 근본이 되며 방편이 구경이 된다고 했습니다. 또 보리란 ‘여실(如實)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며 마음과 보리와 허공의 성품이 동일하므로 스스로의 마음에서 보리와 일체지지를 구해야 한다고 주심품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마음은 알아지는 작용, 즉 육문(六門), 눈에서 봄이, 귀에서 들음이, 코에서 냄새가, 혀에서 맛이, 몸에서 감촉을 느낌이 끊임없이 알아지고 있습니다. 그 앎을 바탕으로 아주 짧은 순간 그것을 무엇인지 해석하는 작용과 반응하는 심리현상이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이 모두가 대상과 함께 알아지는 작용, 즉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앎에 실재하는 것과 마음이 해석한 것이 있습니다. 여실하게 자기마음을 안다는 것은 이 앎에 실재하는 법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실재를 모르고 마음이 해석한 관념만을 알 뿐입니다. 

지금의 앎에서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마음이 지어낸 관념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실재를 불교에는 빠라마타, 법(法)이라 하고 법에 대한 이해를 통찰지, 반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지금 앎에서 실재 있는 법을 끊임없이 알아갈 때, 실재하는 법의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수행은 이 실재하는 법을 무상·고·무아라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보리와 허공의 성품이 동일하다는 것은 허공이 텅 비어있지만 구름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처럼 앎에서 실재하는 법도 끊임없이 생겨나고(무상) 그 무상한 변화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로 연기    (緣起)한다(무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내게 알아지는 앎에서 실재하는 법을 알아가게 되면 그동안 집착하던 대상들, 예를 들면 나와 세상 같은 그런 존재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이며 실재하는 것에는 어떠한 집착할만한 것이 없으며 염오(厭惡)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염오는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으며 묶여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현재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알아차림할 때 알아지는 것에서 실재와 관념을 이해하고 실재 있는 법이 ‘무상·고·무아’라는 허공상의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집착하던 모든 대상을 염오하게 되고 대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탐진치의 괴로움은 줄어듭니다.


‘보리는 여실(如實)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수행적 측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도경스님은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불교에서 말해지는 모든 실재, 곧 법이라는 것은 모두 다 앎을 기준으로 정의된 것입니다. 나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이 순간 앎의 진행이기 때문에 이러한 앎의 진행에 진짜 인 것, 실제 체험되는 것, 이걸 우리는 실재, 법이라고 정의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겐 손의 느낌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실제로 아는 것은 손입니까? 아니면 느낌입니까? 여러분이 실제로 아는 것은 느낌입니다. 손은 느낌을 통해서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느낌이 실재이고 손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실재 있는 느낌을 아십시오. 무엇의 어떤 느낌이 되었든 단지  ‘느낌 있다’라고 아십시오. 느낌을 단지 느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느낌이 만들어내는 모든 관념들, 손의 느낌, 엉덩이 느낌, 아픈 느낌, 괴로운 느낌 이러한 모든 관념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실재는 다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소리 있을 때 ‘소리 있다’라고 아십시오. 그 소리가 새 소리든 바람 소리든 자동차 소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리 들음에 있었어 새, 바람, 자동차란 것은 실재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집 안에 있으면서 자동차 소리를 들을 때 실재  아는 것은 ‘소리’입니다. ‘자동차’는 소리를 통해서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실재 있는 소리를 아십시오. 무엇의 어떤 소리가 되었든 단지 ‘소리 있다’라고 아십시오. 

소리를 단지 ‘소리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소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관념들, 자동차 소리, 시끄러운 소리, 나를 욕하는 소리, 이러한 모든 관념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실재는 다 같은 소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있을 때 ‘생각 있다’라고 아십시오. 그 생각이 어떤 내용의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내용은 실재로 내 삶에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내 아들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아들이 내 앞에 있어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속에 아들은 실재 아들이 아닙니다. 

단지 ‘생각 있다’라고 아십시오. 생각을 단지 ‘생각이다’라고 통찰할 수 있다면 생각이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의 내용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를 사기 친 사람에 대한 생각이든 우리 집에 있는 귀여운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든 둘 다 몇몇 영상과 언어화된 내용들이 내 마음을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생각도 실재의 물리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면 두려워하고 어떤 생각을 하면 걱정합니다. 이건 생각의 내용을 마치 내가 지금 체험하듯이 믿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는 것이지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면서 체험하듯이 고통 받고 있다면 이건 진정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단지 ‘생각있다’ 라고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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