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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수호의 금강도량 개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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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8-04-07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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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1 06:49 조회 4,3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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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수호의 금강도량 개천사
하늘이 열리듯 진리를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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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대정사                   삼정행 지수



개천사(開天寺) 총지종의 태동과 더불어 즉신성불의 대도 밀교의 문을 열고 영남의 중심도량으로 우뚝 선 개천사는 대구시 중구 봉산동 230-1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대구 향교를 돌아 개천사를 찾아 들어가니 법회에 참석하는 교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서원당이 빽빽이 들어차며 주교인 수성 대정사의 집공으로 진언염송의 엄숙하고 우렁찬 소리가 울려 나왔다. 수성 대정사와 삼정행 전수는 여법하기로 소문이 나신 분이다. 총지종의 초창기로 부터 죽비를 잡은 이래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원정 종조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실천하면서 교화에 전념해 왔으며 종단의 원로 서 정법 수호에 앞장서 왔다.

개천사가 세워진 것은 총기 2년. 처음에는〈대구선교부〉라는 이름으로 남산동에 자리를 잡았으나 그 후 교 세확장과 더불어 지금의 봉산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개천사의 역사는 총지종의 역사와 함께 하며 또한 그 것은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온 수성 대정사와 삼정행 지수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삼정행 지수는 오늘의 개천사를 있게 한 주인공이다.

삼정행 스승님은 28세 때에 진언 밀교에 입문한 이래 가족을 제도하여 부군인 수성 대정사도 같이 밀교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총지종의 태동기인 19기년 수성 대정사께서 서 울에 들러 원정 종조로 부터 준제법 을 받아 오셨는데 정작 이 법을 가지고 공덕을 크게 본 것은 삼정행 스승 님이었다고 한다. 그때 까지만 해도 불공방법이 금강지 권에 옴마니 반메 훔 을 염송하는 것이었는데 원정 종조께서 대일여래의 결인과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함께 하는 것은 삼밀의궤에 어긋난 것임을 뒤늦게 아시고 여법하 게 삼밀 수행을 하기 위하여 준제법을 시행하셨던 것이다. 수성 스승님 이 받아 오신 준제법을 본 삼정행 스승께서는 이 법을 가지고 칠일동안 그야말로 여법하게 정진을 했는데 말 할 수 없는 공덕이 일어나더라는 것 이다. 삼정행 스승께서 수성님이 경 주에서 사오신 염주를 처음으로 손에 들고 준제법으로 불공을 한 결과 그 때까지의 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원래 유별나게 몸이 약했던 삼정행 스승님은 이 불공으로 공덕을 보고는 다른 보살들에게도 이 법을 권했는데 다같이 신묘한 공덕을 보았 다는 것이다. 이렇게 준제법을 행하 는 보살들이 자꾸 불어나자 나중에는 아예 집에다 본존을 봉안하고 같이 불공을 했는데 걷잡을 수 없이 사람 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집이 비좁아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는 총지종의 초창기로 정 식 스승도 없이 준제법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스스로 교도 가 되고 스승이 되어 함께 불공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가운데서 이 들을 이끌었던 것은 삼정행 보살이었 다. 번듯한 사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식 스승이 부임하여 지도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네 집을 제공하여 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이끌다 보니 가정생활도 엉망이 되고 수용할 공간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정도로 사명감에 불타 그러한 어려움을 감수하며 법을 전하고 사람들의 병구 완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곤란 했던 것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원정.종조님에게 말씀드리자 초창기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원정님께서 서원당을 마련하라고 약 간의 돈을 내려 보내 주셨는데 그 돈 으로는 서원당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사비를 보태어 남산동에 우선 자리를 마련했다. 대형 탁구장 이 한 동 있었는데 그것을 개조하여 서원당으로 삼은 것이 바로〈대구선 교부〉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이때 쯤에는 시내에 소문이 자자 하여 택시운전 기사들도 남산동 병 잘 고치는 집에 가자고 하면 두말 없 이 대구선교부로 데려다 주고 했다는 것이다. 정신병자들도 몰려왔는데 대 부분이 완치되어 돌아갔다. 심지어는 나병 환자까지 나았다고 한다.

삼정행 스승은 그 당시에는 스승이 되기 전이라 다같은 교도의 신분 으로 이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혼자서 

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주교를 파견해 달라고 통리 원에 요청을 했더니 적임자가 없어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은 지금은 열반 하신 환당 대종사께서 주교로 내려오 시게 되었다. 그러나 환당님은 역경을 비롯한 종단의 기틀을 다지기 위 한 여러 가지 사업에 주력하시던 때 라 서울에서 내왕하셨기 때문에 교화 에 전념하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종단에서는 삼정행 보살에게 승직에 올라 주교를 맡을 것을 누차에 권유했지만 가정 주부로서 선뜻 중책을 맡는 다는 것이 결심이 서지 않아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원정님께서 갑자기 삼정행 전수 내외를 서울로 부르시더니 계를 받으라고 엄명을 내리시면서 삼정행 전수를 주교로, 공직에 몸 담고 있으 면서 초창기 부터 종단의 감사직으로 있던 수성님은 명예정사로 임명하신 뒤 교도들에게도 그렇게 공표하셨다. 이렇게 되어 떠밀리다시피하여 교화 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이것도 다 부 처님과의 인연이고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하고 교화에 전념한 지 근 삼십년을 바라 보게 된 것이다. 그 이후〈대구선교부〉는 계속 발전하 여〈개천사〉라 이름짓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 개천사로 인하여 효 목동의〈제석사〉와 영천의〈단음사〉 가 세워지게 된 것도 다 이 두분의 공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삼정행 지수께서 교화에 전념하시 는 동안 수성 대정사는 사감원장, 대구 경북 교구장. 종의회 의장, 종립 동해중학교의 이사장 등 종단의 요직을 맡아 종정에 참여하며 총지종의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신정회 회장인 불토정(추두남) 보 살에 따르면 개천사의 초창기 부터 스승님 내외분을 보아 왔지만 항상 흐트러짐 없이 정법으로 지도해 주시고 수행자의 풍모를 잃으신 적이 없 었다고 한다. 특히 수성 정사님은 항 상 온화한 태도로 교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때문에 말씀만 들어 도 모든 근심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휴인 심수행 보살은 삼정행 스승에 대해서 원리원 칙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사사로운 정에 끌림이 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 며 겉으로는 엄해 보이지만 실은 자 비심이 너무 깊어 관세음보살의 화현 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개천사는 이러한 두분의 지도로 그 어느 곳보다 신심 깊은 교도들이 많으며 단합이 잘된다고 했다. 기자 가 방문한 그날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환담을 나누고 찬불가 연습을 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방생법회나 창교절 행사등에서도 개 천사는 항상 적극적이고 단합된 모습 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창교절 행 사에서는 교도들이 자발적으로 축제 프로그램을 만들어 찬불가 발표와 함 께 예능 방면에서의 서로의 기량을 뽐내고 어린 불자들로 하여금 재능을 자랑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 다. 또한 교도들의 사회활동도 두드러져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 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 아쉬운 점은 우리 종단의 법회 성격상 서로가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어울릴 수 있는 시 간을 할애하기가 힘든 것이라고 한다. 도시 생활 속에서 모두가 시간에 쫓겨 정진하다 보니 불공 이외의 것

에 눈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풀 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다. 간부보살 들에 따르면 자성일 법회에서 보살들 끼리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좀더 할 애된다면 더욱 많은 교도들이 확보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화 방편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가 보다.

이러한 여러 사정에도 불구하고 개천사가 우리 총지종의 정법도량으 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은 시대 의 변화와 무관하게 한결같이 원정님 법을 그대로 이어 받아 시행하고 있 다는 점이다. 수성 정사님이나 삼정행 전수께서는 모든 것이 여법하게만 시 행된다면 교화에 대해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불교, 특히 밀교의 수행은 어디까지나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고행의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수행을 하면서, 그리고 교화를 하면서 편한 것을 바 라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일부 사원에서 교화의 방편으로 몇가지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대하여 삼정행 스 승님은 일축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삿된 법이 들어오면 밀교는 미신의 앞잡이가 된다. 스승은 스승답게 교도는 교도답게 항상 정도를 걸으며 노력 정진하면 공덕은 저절로 일어난 다. 정도는 곧 원정님이 주신 밀법이 다. 교화가 잘 되지 않고 공덕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환경과 여건을 탓 하기 전에 그것은 모두 본인의 책임 이다. 무슨 일이건 정성을 다 기울인 뒤에 겸허히 결과를 기다려라. 법신 불은 절대 그러한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다.

정법을 수호하는 스승다운 말씀이다. 두분 스승님의 한결 같은 원력으로 일어난 개천사가 길이길이 번창하 여 이 땅에 밀엄국토가 하루 빨리 앞 당겨지기를! 옴마니반메훔!

정리 : 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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