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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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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0-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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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19:49 조회 1,2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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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에 따라
중국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며(2)

 8면에 이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장경들이 국보 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와불전 정문의 양쪽에는 벽돌 조각 의 정교한 불화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기원연법’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시는 내용을 담았고, 하나는 서방성경이라  하여 아미타 삼존불을 묘사한 것이다. 그 밖에도 와불전 안에는 십팔나한상도 있고(서유기) 책으로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의 전설에 관련된 그림도 남아있다. 유명한 저팔계의 고향이 장액 교외의 고로장이란 곳인데 원래는 무척 부 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손오공에게 패하여 현장스님을 따라나서게 되었고 도중에 내내 고향의 고씨 처녀를 잊지 못해 이 곳 고로장에 돌아오고 싶어 그렇게 말썽을 부리곤 했다는 것이다. 와불전에 그려진 그림 속의 저팔계는 말썽꾸러기가 아니라 현장스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역 할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이 고장 출신인 저팔계가 고향사람의 그림에서는 덕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와불전 부처님 열 반상의 장엄한 상호와 아주 장엄한 상호의 보살상 등 벽화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일부 남아있었는데 꼭 다시 찾고 싶은 곳 이다.

장액은 변방에 있는 도시지만 상당히 중국적인 분위기를 지닌 도시인데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대불사만 보고 지나왔다. 수나라 때 세워졌다는 장액의 그 유명한 만수사목탑과 동진 때의 마제사석굴 등을 보 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인연이 있 으면 또 와볼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가욕관을 향해 떠났다. 장액에서 가욕관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군데군데 만리장성의 흔적이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끝이 없는 둣 끊어지듯이 이어졌다. 잊힐듯하 면 눈에 뜨이는 이 곳의 장성은 돌로 된 것이 아니라 흙벽돌로 쌓았는데 세월이 워낙 오래다 보니 사막지대의 건조한 곳 인데도 담벼락이 허물어졌다. 북경 근처 에서 본 돌로 쌓은 만리장성과는 판이하게 허술한 모습이었지만 이렇게 먼 곳까지 성벽을 쌓으려 했다니 정말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더구나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가려고 해도 언제 갈지 모르는데 그 긴 거리를 성을 쌓으려 했으니 여기에 동원된 백성들의 노고가 눈에 선하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데도 오직 바깥의 외적을 막 으려고 몸부림친 어리석은 독재자들의 흔 적 같아서 경탄과 함께 씁쓸한 비애감을 느낀다. 역대 왕조는 거의가 다 스스로의 부패와 무능으로 무너진 것이지 외적의 침입은 그저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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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요새 가욕관

가욕관은 만리장성이 끝나는 서쪽의 마지막 관문에 축조된 성채이다. 만리장성은 동쪽 끝이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을 기점으로 해서 장장 6,000께를 달려와서 이곳 가욕관에서 절정을 이루고는 꼬리를 감춘다. 이른바 만리장성은 주 나라 말기에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 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진시황이 대부분을 축조했고 그 이후 역대왕조에서 조금씩 연장하여 이루어진 것이 지금의 길이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위용을 자랑 하는 가욕관은 명대인 1372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숱한 시인 묵객들의 묘사의 대상이 되었다. 옛 싯구를 읽으며 상상하던 가욕관이 내 눈앞에 장대한 모습으로 펼쳐지니 순간 시공을 초월한 듯 마음 속 깊이 묘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가 욕관을 보려고 그 먼 곳에서 달려왔던 사람들 생각하면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 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눈 덮인 기련 산맥을 배경 삼아 막막한 사막 가운데 서 쪽으로 기우는 황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3채의 웅대한 성채는 말할 수 없는 위압 감을 주었다. ‘천하웅관'이라는 가욕관의 별명이 말해주듯 사막 한 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그 모습에 많 은 서역인들이 중국 영토에 첫 발을 내디 뎌 보고는 그 위세에 한 수 꺾고 들어갔을 만하다. 석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십수미터의 벽돌담은 하층부의 두꺼운 곳이 25미터나 되며 상층부는 5미터가 넘는다는데 먹을 것만 있으면 이곳에 웅크리고 어떠한 적도 물리칠 수 있을 것같았다.

거리나 여비 등을 감안할 때 일반 사람 들은 오기가 좀체 어려울 것 같은데도 이 렇게 먼 곳까지도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 중국 인구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가욕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보름달 을 감상하고 싶었는데 성수기라 숙소 예약을 하지 못해 주천으로 돌아와서 자게 되었다.


주천의 개발과 법당사

주천이라는 이름은 옛날 한무제 때에 곽거병장군의 공로를 치하하여 무제가 술 한 단지를 하사했는데 곽장군은 혼자 마시지 않고 금천이란 샘 물에 부어 병사들과 같이 나누어 마신 데  유래한다고 한다. 현재의 중국 정부에 서는 이곳을 개발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수십 층의 빌딩 을 짓고 있는데 현재의 주천의 인구를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정도로 규모가 컸다. 사막 한 가운데에 대형 빌딩과 대규모 아 파트 단지가 들어선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아마 이 곳을 개발하여 한족을 이 주하게 하여 변방의 소수 민족을 통제하 려는 의도에서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 같았다. 만약 의도대로 수백만이 몰려 와서 산다고 한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생 활 용수를 어떻게 감당해 낼지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겠지만 못내 궁금 하였다.

저녁은 법당사라는 곳에서 먹 었는데 오래된 절은 아니고 1995년부터 짓기 시작한 모양인데 사막의 먼지가 많이 날아와서 건물을 뒤덮다 보니 언뜻 보 면 매우 오래된 절처럼 보였다. 아직도 계속하여 불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높이 40미터의 팔각불탑은 얼마 전에 완공되었고 길이 36미터의 동 와불은 지금 조성 중이라고 한다. 이왕이면 서있는 불상을 조성하는 것이 나을 듯한데 왜 와불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 르겠다. 아마 먼지와 바람이 많은 지역이 라서 불상을 실내에 모실 필요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불상을 크게는 만들고 싶고 그러다 보니 좌불은 천정 높이가 부 담이 되어서 한계가 있으니 와불을 모시 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주지스님께 질문을 해도 명확하게 답을 하지 않았는데 법당사 자체가 가욕관에 오는 관광객의 발길을 주천으로 돌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성되는 절인 만큼 뭔가 특색을 지니기 위해서 이런 대규모 의 불탑과 불상을 조성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완공된 후의 조감도를 보니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들를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런 대규모의 불사가 이루어져 일반인들이 불교와 조금 이라도 인연을 맺게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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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적 신비를 지닌 유림굴 옛사람의 불심을 보는 듯

다음 날인 8월 1일은 드디어 돈황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가는 도중에 돈황 석굴군의 하나인 안유림굴에 들렀다. 유림굴은 만불협이라고도 하는데 안서현 서남쪽 75키로미터쯤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림하라는 협곡을 따라 흐르는 하 천에 양쪽으로 유수가 우거져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을 찾아가는데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물어 볼 곳도 없고 한참을 헤맨 끝에 황량한 사막의 한 가운데서 부모와 그 자식으로 보이는 세 명의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밝고 귀여운 표정의 아이들은 절반이 안되는 물이 담긴 패트병을 들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손짓으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다. 왜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한 가족이 뜨거운 햇살아래서 황량한 사막에 앉아 있는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겨우 동굴이 있는 골짜기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보 니 대부분이 평원이고 얕은 산들이 계속 이어져 있는데 인가라고는 보이지를 않았다. 인가는커녕 사람이 산 흔적도 거의 보이지를 않았는데 황량함 그 자체였다. 햇살은 또 얼마나 따가운지 소변을 보기 위해 가끔 차에서 내리면 후끈한 열기가 가히 살인적이었다. 가끔씩 이곳 협곡에 서 흘러나온 물이 인공도랑을 타고 물살 이 제법 세게 어디론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아마도 근처의 어느 지역의 생명수로 공급되는 것이려니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여기에 와서 새삼 깨달았다. 우리도 얼마 있지 않으면 물 부족 국가가 된다는데 물을 아껴 쓰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낭비하며 쓰는 물이 환 경오염과 함께 결국은 물 부족이라는 끔 찍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사 막을 가로질러 와서 유림굴에 도착하니 태고적 정적에 내가 최초로 이 석굴들을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굴이 조 성되기 시작한 것은 당대부터이며 오 대, 송, 서하 등을 거쳐 원대에 마 무리되었다고 한다. 동굴은 모두 43개인 데 유림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 기슭에 31 개, 서쪽 기슭에 12개가 있다. 동굴은 당 대에서 청대에 보수된 것까지 시대별로 골고루 남아 있는데 완전히 다 개방하지는 않고 그 중 몇 개만 개방하여 관광객 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훼손된 부분도 많았지만 굉장히 정교한 벽화며 소조상들이 남아 있었다. 벽화는 천정 에까지 그려져 있었으며 묘사가 매우 생생하고 특히 비취색을 섞어 그린 불화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고 장엄했다. 사실적 묘사를 하면서도 종교적인 경건함과 상상력을 한껏 펼쳐 구성한 벽화 들은 가히 국보급이라고 할만했다. 당나 라 때의 것들이 비교적 모양도 좋고 색채도 아름다웠으며 원래의 것이 훼손된 자 리에 청대의 것이 대신 들어선 것이 있었는데 불상의 상호며 정밀함이 그 이전 것 들에 비해 턱없이 떨어졌다. 역시 불화나 불상은 그 시대의 교세와 신심을 반영하 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불교가 홍왕하던 고려 때와 억압받던 이조 때의 불화 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이 너무나 뚜렷 이 드러난다. 이곳의 유적들이 많이 훼손 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자연적으로 훼손 된 것이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문화혁명 때 홍위병 들에 의해서 여지없이 파괴되었을 거라고 안내원이 말해주었다. 극성스러운 홍위병 들도 이렇게 떨어진 사막 가운데의 유림 굴까지는 올 엄두를 못 냈던 모양이다.

이렇게 외따로 떨어진 유림굴에 누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도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벽면에는 청대나 그 이 전에 이 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기념으로 한 두자 씩 적어 놓고 간 것이 많이 있었는데 차를 타고 와도 찾아오기가 이렇게 힘든데 도보로 어떻게 그 사막길을 걸어왔는지, 또 길이 제대로 나 있지도 않았을 옛날에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는 지, 길 물어 볼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행 여나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쉬웠을 텐데 이 동굴 한 번 보자고 그 먼길을 왔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불가사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사람도 다녀갔는지 불전함에 천원짜리 지폐가 눈에 뜨인다. 이곳은 관광 코스로는 도무지 수지가 안 맞는 곳이라서 난 내가 최초로 온 한국사람이 아닌가 은근히 기대 했는데 나 같이 극성떨고 이곳에 와 본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 사람 만나서 같이 이곳의 감상을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 곳 유림굴은 나중에 본 돈황의 막고굴과는 달리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관광객도 우리 일행 이외에는 보이지도 않았고 태고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인상 깊은 곳이었다. 사막 가운데의 이곳 에서 동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천년 뒤에도 이 그림들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을까? 오직 불심 하나로 그냥 작업에만 몰두했을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호흡했다는 뿌둣함만 안은 채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림굴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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