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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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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0-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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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19:37 조회 1,1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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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 중국불교 유입의 길목에 따라
중국 감숙성 불교계를 돌아보며(2)

글은 법장원 연구원인 화령정사가 중국 감숙성 불교유적지와 현재 그 지역에서 불교의 역할을 이끌고 있는 중심사찰을 돌아보고 쓴 글이다. 감숙성은 실크로드로 가는 간선도로가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며 중국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땅이다. 이곳에서 불교 전래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그 중에서도 돈황 석굴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유적지이다. 이 글은 감숙성의 불교 유적과 함께 그 곳에서 만난 불교계의 여러 인사들에대한 느낌을들여 3회에 걸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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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사 대불전 전경



장액의 대불사와 만리장성의 끝 가욕관

무위에서 이틀을 자고 7월 31일 아침 일찍 장액을 향해 출발했다. 중국이란 큰 땅덩어리 전체가 하나의 시간으로 시차가 없는 관계로 중국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감숙성은 해가 늦게 지고 늦게 동이 트기 때문에 아침 6시경이면 거 의 우리나라의 새벽 4시경이 된다.

여름이지만 새벽 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아침은 차로 이동하면서 과일 등으로 때웠다. 이곳은 비교적 과일이 풍부한 곳 인데 수박은 생각보다 그렇게 단맛이 없고 백옥란이라는 메론같은 노란 과일이 참맛있었다. 생기기는 참외 비슷 하게 생겼쁜테 그것보다 휠씬 크고 아주 달며 달며 값이 싸서 감숙성에 있는 동안 무척 즐겨 먹었다

무위에서 서북쪽으로 하서주랑을 따라 가다 보면 좌우 산맥 사이의 좁은 목 부분처럼 생긴 지대가 장액이다. 장액까지 가는 동안은 내내 사막인데 사막 한가운 데에 난 길이 감신공로라고 하여 난주에서 일직선으로 펼쳐져 신강 위 그루족 자치구의 성도인 우루무치까자 이어져 있다고 한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에 모두 아스팔트를 깔아 놓았는데 이 길을 따라서 실크로드의 북쪽길이 이어진다. 옛날에는 길도 잘 나있지 않았을 텐데 현장스님이 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차로 가도 이렇게 끝이 없 는 길을 뜨거운 햇살아래 부처님 경전을 구하겠다는 신심 하나로 저 먼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을 생각을 하니 옛 수 행자들의 구도 정신에 새삼 머리가 수그려진다.

햇살은 정말 뜨겁다. 주위에는 온통 황량한 자갈밭뿐이고 가끔 저 멀리 눈 덮인 기련산맥 나타날 뿐이다. 난주를 떠난 첫 날부터, 서북쪽을 향해 떠나서 달려가는 후리 ’차와 마주쳐서 오-는 많은 트럭 위에는 위그르 신강지역의 특산인 메론이 차 량마다 가득 실려져 있었다. 적재량을 초과한 듯이 실은 낡은 트럭들이 우리를 스 쳐지나갔는데 중국전역으로 팔려가는 메 론이라고 한다.

불안할 정도로 낡은 차량도 많았는데 수백키로의 먼길을 달리는 속에서 고장이 나서 과일을 잔뜩 싣고서 대책없이 사막 위 대로 옆에 서있는 트럭을 보게 되면 대신 걱정을 하기도 하고 낡은 트럭에 위 태위태 너무 많은 과일을 욕심껏 실은 트럭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 손에 땀이 배이기도 하면서 우리 일행은 뜨거운 사막 위에 뚫린 길을 달려갔는데 그저 중국대륙 이 넓다는 생각밖에는 안든다.

사막 가운데에도 가끔씩 이름 모를 식물이 무더기를 지어 자라고 있는데 그 끈 질긴 생명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소변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리니 공기 속에 서 무슨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해스님이 풀에서 나는 향으로 양들이 먹는다 고 한다. 사막지대를 다니는 내내 풀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 향이 좋아져서 무의식적으로 향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사막에서 도대체 무슨 생물이 있나 살펴봤더니 개미도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도마뱀도 무척 많다. 고운 모래결의 사막이 아니라 척박한 마른 땅으로 이루어진 사 막으로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생명활동이 일 어나고 있는 것이 경이롭다. 휴게소란 없 는 사막 위 도로에서 약간의 구릉이 있는 곳을 골라서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오면 돌아가며 누군가는 물병을 들고서 일행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봉사해서 마치 노천 화장실이 아닌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듯 하였다. 잠깐 동안 햇살 아 래 있었는데도 햇살이 강해서 얼굴이 타는 느낌이다. 가도가도 똑같은 풍경이 전 개되어 나도 모르게 차에서 깜빡 잠이 들 었다.


서역 진출의 교두보 장액

대불사의 와불과 장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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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관 성루



거의 일직선으로 펼쳐져 있는 사막 길을 따라 무위에서 4시간 정도를 가니 장액이 나타난다. 장액이라는 뜻은 중국본 토에서 서쪽으로 팔을 펼친 모습을 하 을 때 장액이 겨드랑에 해당된 위치여서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말하자면 이곳이 서역진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던 셈이다. 이 장액을 교두보로 해서 서역의 여러 루트로 중국인들이 진출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여러 통로를 거쳐 온 서역인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 이곳 장액이었던 것 이다. 한나라 때에 군으로 설치되고 당대 에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로서 사막의 오아시스 역할도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그가 이 곳에 1년 정도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이곳 장액은 기련 산맥의 눈이 녹아 내려와서 비교적 물이 풍부하여 나무도 많고 농사가 잘되어 하 서주랑의 양^창고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주로 생산되는 산물은 밀과 면화 , 등인데 오랜만에 밀밭과 목화밭을 보니 잃어버린 우리나라의 옛날 풍경을 보는 듯 했다. 뜨거운 햇살 속 여정에서 차에 비록 에어컨이 있어도 차에는 항상 최소 두 상자의 물을 준비해 주었는데 마침 길 가 도로변에서 메론을 파는’곳이 있어서 이 곳이 고향인 이해스님이 직접 골라 한 포대 사서 차에 싣고 가다가 도로변에서 쉴 때마다 맛있게 갈라먹었다. 다 먹고 난 과일쓰레기는 사막에 사는 중생에게 먹을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쓰레기까지 길가에 버리는 현지인들의 자연스런 행동에는 차가 떠나 안보일때까 지 민망하였다.

장액 시내에는 유명한 사찰인 대불사가 있다. 이 절은 장액시의 서남 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하 영안 원년인 서기 1098년에 창건된 절이다. 처음 에는 가섭여래사라고 했다가 명나라 때에 중수하여 보각사라고 했으며 청나라 때는 굉인사라고 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스 님이 이 절터에서 와불상을 발견하여서 하왕 이건순에게 바쳤더니 왕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고자 이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대형 와불을 조성하여 이 곳에 모시고 왕이 절 이름을 와불사로 내렸는데 와불이 워낙 크기 때문에 통칭 대불사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와불은 길이가 35미터로 실내에 모셔진 와불로는 중국에서 가장 큰 것이 라고 했다. 상호도 아주 원만하고 와불안 에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와 불을 모신 대전도 크기가 무척 웅장하여 높이가 20여 미터나 되는데 오랜 역사의 흐름을 거친 모습으로 있었다. 명대에는 역대 황제들이 이 절에 관심을 가져 수 천리나 떨어진 이 곳에 금으로 씌여진 불경도 하사하고 대장경이나 온갖 귀한 것 들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명대에는 그 규모도 어마어마했는데 지금은 많이 파괴되 어 와불전과 장경각 등 몇 군데만 남아 있다. 특히 문화혁명 때는 홍위병들이 트 을 타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절을 파괴 했다는데 그 무모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 할 뿐이다. 잘못된 정치지도자나' 이념이 얼마나 나라를 해치는지를 이로써 극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불교 유적들도 무식한 위정자들이나 이교도들 에 의해서 파괴된 것이 무척 많은데 지금 이야 눈이 무서워 대놓고 파괴하지논 못 하지만 불교계 스스로도 불교문화재 보호 에 소극적이고 사찰환경을 훼손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또한 음성적인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곳 대불사에서도 문화혁명 때에 장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느 스님이 장경을 벽 속에 감추고 겉에서 흙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아 훼손을 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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