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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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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4-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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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2 04:47 조회 5,7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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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4
밀교문화와 생활 39

중생의 마음이란 그릇된 망심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올바르게 행하려는 마음도 있다. 가영심이나 무심, 격고심 등이 그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도 지나치게 넘치거나 숭상한다면 아니 갖는 것만 못하다.


가영심

가영심은 노래하는 마음이다. 무슨 노래인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노래다.『대일경소』에서 가영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것은 전법의 소리를 비유한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곡을 남에게 전해주어 선교를 얻고 나서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주함에 갖가지 미묘한 소리를 내니, 듣는 자는 환희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노래하는 사람은 불러서 즐겁고 듣는 사람은 들어서 즐겁다. 모두 환희한 마음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에 선교를 얻는다 것은 최상의 일이다. 커다란 공덕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선교를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니 그 환희는 배가된다. 선은 선을 낳는 법이다. 베품은 나눔이요, 나눔은 함께 하는 것이다. 대승 보살의 표본이자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노래로써 나눔을 실천하는 마음은 중생의 마음이 선심으로 가는 길이다. 즉 수행하는 마음이다. 이를『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마음은 다른 이로부터 정법을 듣고자 하며, 내가 중생을 위하여 되돌려서 갖가지의 문구로써 장엄하고 분별하여 연설해서 이

묘음으로 처처마다 듣고서 알게 하겠다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심이다.

자기 수행과 함께 다른 이를 위해 회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회향이란 자기가 닦은 수행과 그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깨달은 자는 무명 중생을 깨우쳐 주고, 닦은 사람은 중생을 선도하고, 재물 많이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지식과 재능이 풍부한 사람은 부족한 자를 위해 기부하는 것이다. 모두 일체중생을 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영심은 모두를 이익되게 하는 마음이다. 이타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무심

무심은 춤추는 마음이다. 춤추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맑고 기쁘게 해주는 마음이라고 한다.

『대일경소』에서 무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무심이라 하는가. 법을 잘 수행하여 더욱 향상함으로써 갖가지의 신변을 행하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팔 다리를 뻗고 움직이는 것을 춤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변도 역시 그러하다. 일찍이 없었던 갖가지의 일을 나타내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춤추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다.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며 자리이타의 마음자리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넘치거나 단지 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이의 경계를 주의해야 한다. 이를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실지(성취)를 지나치게 숭상하며 방편으로 구하는 것은 청정한 마음을 장애하는 것일 뿐이다.’ 무심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오히려 청정하지 못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다스리는 방법을『소』에서 이르기를, ‘제개장삼매로써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신통으로 멸정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신통으로 멸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멸정에 이르는 것이 신통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도이며 외도이다. 바른방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바른 가르침에 의해 바른 방편으로써 정에 이르러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바른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제법실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각이며 여실지견을 말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여여하게 보아야 한다. 헤아려서 아는 것이다.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선정이다.

가지신변에 탐착되어서는 안 되고, 조그마한 영험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수단이 목적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수행기도에 비유한다면, 진언염송이 목적이 아니라 진언염송을 통해서 올바른 행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격고심

격고심이란 스스로 북을 치려는 마음이다. 왜 북을 치는가. 법에 잘 따르기 위한 것이다. 법을 잘 따라서 결국 깨우침을 얻게 하

려는 것을 의미한다.『대일경소』에서 격고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격고심이라 하는가. 스스로 법고를 치려는 마음으로서 법에 잘 따르는 것을 말한다. 북은 중생들을 경계하여 깨우침을 얻게

한다.’

중생을 깨우치게 하려는 마음을 법고에 비유하였다. 실제로 사찰에서 예불을 드릴 때 법고를 치는데, 북을 치는 이유는 시

방세계를 깨우치고, 축생의 부류를 제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법고는 부처님의 법을 말하는 것으로, 법고를 울린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법을 널리 알린다는 의미다. 그래서 불법이 널리 세간에 전하는 것을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 것에 비유하고, 교법으로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던 군사들이 북소리가 울리면 전진해 적을 무찌르는 데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북을 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단지 말재주를 익혀서 중생을 깨우치려고 한다면 이는 온당치 않다고 말한다. 술수의 방편으로 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대일경소』의 설명이다. ‘만약 수행하는 사람이 중생은 긴 밤에 혼침하니, 내가

갖가지의 걸림 없는 변재를 익혀서 대법고를 두드려 이로써 깨우치게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청정한 마음을 방해할 뿐이다.’ 갖가지의 걸림 없는 변재로써 법을 설하고 깨우치려고 한다면, 이는 모래로 밥을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만 번드레한 것은 바른 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깨우치도록 해야 하는가.『대일경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있다.

‘일찍부터 한량없이 많은 어언다라니를 증득하여 천고의 묘한 소리로써 널리 모든 중생들에게 고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진언다라니로써 법을 설하고 진언다라니의 소리를 널리 퍼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고의 묘한 소리며, 진언의 묘음이다. 천고는 도리천의 선법당에 있는 북으로, 두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묘음을 내는 북이다.

그러면서 ‘세간의 적은 이익으로써 일대사의 인연을 방해하지 말라’고 한다. 세간의 적은 이익은 현세적인 이익이다. 그러나 일대사의 인연은 불법을 만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인연이다. 그것은 곧 진언다라니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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