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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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5-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법경 필자소속 - 필자호칭 주교 필자정보 법경 정사(정각사 주교/ 철학박사/ 동국대 강사)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2 07:46 조회 5,569회본문
밀교문화와 생활 40
중생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거나 동굴, 바람 등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마음이 실댁심, 굴심, 풍심이다.
여기서 집이나 동굴, 바람 등은 좋은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실댁심, 굴심, 풍심은 좋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이 넘치거나 잘못 쓰이게 되면 아니 갖는 것만 못하다고 경전에서는 강조한다.
실댁심
실댁은 집을 의미한다. 집은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안전하고 평안한 곳이다. 그래서 실댁심은 편안한 마음, 즉 선정심을 가리킨다. 수행하는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대일경소』에서 실댁심을 이렇게 설하고있다.
‘무엇을 집의 마음[실댁심]이라고 하는가? 스스로 몸을 보호하는 법을 닦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집을 만들어서 그 몸을 덮어 지키고, 추위와 더위와 바람과 비, 도적과 악충 등의 온갖 요익하지 못한 일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이 이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즉 번뇌 망상과 일체 고통과 괴로움을 여의는 마음이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다. 어떤 수행인가? 그 수행의 요체는 바로 지계이다. 계를 지키는 것이다.『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내가 계를 지니고 선을 닦아서 스스로 방호함으로써 금세와 후세에 악도의 온갖 고통을 멀리 여의겠다고 하는 것이 실댁심이다.’ 이러한 수행자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여 실댁심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실댁심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수행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치 소승과도 같은 것이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금세와 후세에 악도의 온갖 고통을 멀리 여의겠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품는 것은 대부분 성문의 습이다.’
이는 상구보리만 있는 수행이다. 오로지 자기 깨달음만을 구하고자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한 수행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대일경소』의 내용이다.
‘모든 중생들을 구호하여 홀로 한 몸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즉 상구보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화중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불교공부나 수행을 조금 했다고, 마치 한 소식 깨달은 듯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대망어를 저지른 사람이다.
공부와 수행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진정한 공부와 수행은 잘 난체 하지 않는 것이다. 아상과 아만은 수행이 아니다. 지향점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다른 이를 배려해야 한다. 실댁심은 수행자의 좋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한 수행, 마음인가가 중요하다. 자신에게만 갇혀서는 안 된다.
굴심
굴은 좋은 것을 지닌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굴심은 좋은 마음으로 표현된다. 어떤 마음을 말하는가.『대일경소』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굴의 마음[굴심]이라 하는가? 굴에 들어가 법을 닦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굴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대일경소』에서 다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굴 속에는 이른바 모든 용과 아수라 등의 궁전이 있고, 이 굴은 모두 지하 혹은 바다 밑의 깊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곳에는 신비함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굴 속에 대부분 신선의 온갖 약이 있어서 장수하고 자재하며, 수행자는 그 가운데 단정하여 천신과 같으므로, 굴의 마음 [굴심]은 일찍 죽을 근심이 없고, 오욕락에서 자유자재하며, 겁의 수명을 얻어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뵈어야 하겠다는 마음이다.’
참으로 굴의 마음[굴심]은 가진 것도 많고 자유자재한 마음이다. 좋은 마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마음도 잘 써야 한다. 용심이 중요하다. 마음을 잘 써야 한다. 그래서『대일경소』에서 ‘법답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법답게 수행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성제 진리에 따른 팔정도, 십선의 수행이다. 불교의 실천수행의 바탕이다. 이를『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법답게 수행하여 이 생애 동안에 법명도를 보고, 나아가서는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법명도는 일체 진리를 깨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삿된 길에 머물러서 세간 선인의 법을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삿된 길은 무명으로 인한 12연기의 모습이오, 반대로 참다운 길은 여덟 가지의 바른길, 즉 팔정도 수행이다.
풍심
바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머물지 않는다 함은 모든 곳에 두루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바람의 마음 [풍심]은 어떤 마음인가?
『대일경소』에서 풍심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바람의 마음[풍심]이라 하는가? 모든 곳에 널리 두루하여 생기는 성품을 말한다. 바람의 성질은 산란하여서 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데,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여서 온갖 장소에 두루 선근을 심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간 외도의 갖가지 천존 및 삼승의 온갖 수행을 모두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종자를 가지고 온갖 장소에 널리 두루하여지게 하면, 이로써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바람의 마음이다.’
마치 씨앗이 바람에 날려 온천지에 싹을 틔우고 꽃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갖가지 수행을 통해서 공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람은 갈대숲의 바람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는 하찮은 바람이 아니라 온갖 성취를 일으키게 하는 좋은 의미의 바람이다.
그러나 바람이 없다면 자연은 유지 존속될 수 없다. 바람이야말로 자연 생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일체존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즉 지수화풍의 사대가 없다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바람을 천존 및 삼승의 수행에 비유하고 있다. 즉 바람은 결실의 인이오, 천존과 삼승의 수행은 성도의 인인 것이다. 천존은 힌두교의 천신과 밀교의 수많은 불보살과 명왕, 천왕 등의 제존을 가리키고, 삼승은 성문, 연각, 보살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람은 불교의 모든 존상과 가르침, 갖가지 수행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바람이 있어야 좋은 선근을 심을 수 있고 성취를 얻을 수 있다. 바람이 없다면 선근마저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바람도 없고 선근마저도 척박한 불모지에만 떨어지고 있다. 공염불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선근을 심은 갖가지 장소는) 자갈밭, 불모지여서 허무하게 종자를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좋고 아름다운 복전과 기름진 장소에 오롯한 뜻으로 경작하면, 수확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잘 닦아야 한다. 좋은 방편과 가르침, 깊은 신심이 큰 바람[風]이고, 선근의 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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