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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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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8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7-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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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7-09 15:10 조회 4,19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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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밀교문화와 생활 (41회)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7)

중생의 마음은 항하(恒河)의 모래 수 만큼이나 많다. 그 표현에 있어서도 다양하다. 중생의 마음을 밀교의 대경인『대일경』을 통해 살펴본다.


미심(迷心)

중생의 마음은 미혹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미심(迷心)이라 한다. 미혹한 마음이다. 『대일경소』에 미혹한 마음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미혹한 마음이라 하는가? 집착하는 것이 진실과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향하고자 하여도 다시 서쪽을 향하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마음이 아니고 저 마음인 것을 말하고, 저 마음에 이 마음이 있는 것이다. 바르게 집중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종조님께서도 이르시기를, ‘마음이 바로 서면 정신(精神)이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귀신(鬼神)이라 하듯이 미혹된 마음이 곧 귀신이다.

미심(迷心)은 바른 수행을 방해한다.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생각으로는 부정관(不淨觀)을 학습하고자 할지라도 그 반대로 청정한 상을 취하며 스스로 나는 지금 부정관을 닦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닦을 때도 도리어 나는 영원하다는 미혹한 생각을 지니며 내가 지금 무상 무아를 닦고 있다고 하는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산란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부정관은 인간의 몸이 더러운 것을 깨달아 탐욕심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부정(不淨)하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더러운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도리어 청정을 관하는 것은 부정관이 아니다. 물론 부정을 관하는 목적이 청정한 마음으로서 탐욕심을 없애는 것에 있으므로, 청정을 관하는 것이 곧 부정관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는 있겠지만, 부정관은 더럽다는 것을 관하는 것이지 청정 그 자체를 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법이 다르므로 바른 수행이 아니다. 이처럼 중생의 마음이 본말이 어긋나므로 미심(迷心)인 것이다.

또 무상 무아를 관함은 일체가 영원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수행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영원하다고 여긴다면 무상 무아와 거리가 멀다. 집착과 아만으로 갈등과 대립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를 다스리는 법을 『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을 전일 하게 해서, 자세하고 편안하며, 상세하게, 전도됨이 없이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이것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마음의 관찰을 주문하고 있다. 마음의 관찰을 통해 우리는 육근(六根)을 잘 다스릴 수 있다. 미혹한 마음을 제어할 수 있다.


독약심(毒藥心)

중생의 마음을 삼독심으로 표현한다. 세 가지의 마음이 독(毒)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의 독심(毒心)은 탐심․진심․치심이다. 그야말로 독약(毒藥)과 같은 마음이다.

이 독약심을 『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을 독약의 마음이라 하는가? 분별이 끊어진 법에 집착하여 닦는 것을 말한다.’ 무명(無明)과 명(明), 무지(無智)와 지(智)에 대한 분별이 없이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고 멋대로 생각하여 수행하는 것이 독약심(毒藥心)이다. 자가당착이오, 아전인수격의 마음이다. 올바른 수행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정법(正法)이 제대로 들어갈 수 없다.

그 독약심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독이란 용, 뱀, 약초의 온갖 지독한 독을 말한다. 사람이 독에 중독되어 혼절하고 사경을 헤매게 되어 목숨이 끊어질 때와 같이 이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착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맡겨진 대로 움직여 행하고 점차로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는 식의 마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독에 중독되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멈추게 되고 바른 판단이 있을 수 없다. 지혜가 없음은 마치 독약에 중독된 것과 같다. 이를 다스리는 법은 지혜를 닦아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이를 『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깨치고 나면, 대비(大悲)의 온갖 선을 일으켜서 모든 것이 없어지고 나면 그만이라는 공허한 견해를 여의어야 한다.’

망견(妄見)을 버리고 정견(正見)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독(毒)에 물들기 쉽고 악심(惡心)에 염착하게 된다. ‘지혜와 자비는 감로묘약’이라고 『대일경소』에서 말하고 있다.


견삭심(羂索心)

견삭이란 밧줄을 말한다. 그렇다면 견삭심(羂索心)이란 무엇인가?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밧줄의 마음[羂索心]이라 하는가? 모든 곳에서 나를 계박하는 것에 머무는 성품을 말한다.’

계박이란 동여매어 묶는 것을 말한다. 즉, 속박하는 것이다. 무엇을 속박한다는 것인가? 『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사람이 밧줄에 묶여서 손발과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이 멸하여 없어지는 것에 사로잡힌 생각과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생각의 묶임에 빠져 있는 것이다.’

밧줄로 묶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마음도 어느 한 곳에 집착하면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즉 잘못된 생각과 무지(無知)로 인하여 자신을 집착과 망식(妄識) 속에 빠지게 만든다. 마치 밧줄에 묶인 손발과 팔다리와 같다.

무엇으로 인하여 그러하다는 것인가? 그것은 사로잡힌 생각과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사로잡힌 생각이란 단견(短見)을 말한다. 단견은 짧은 생각이란 뜻이나 바르지 않은 생각, 전도된 생각으로서 고통을 낳은 인(因)이다. 즉 열반(涅槃)과 대치는 개념이다. 열반은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탈한 경지이다.

또한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생각은 무지(無知)이다.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단견과 무지는 먼저 자신을 병들게 한다. 『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수행자의 마음을 결박하고, 나아가 모든 장소에서 언제나 구속되어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가장 무거운 장애이다.’

집착과 단견, 무지는 어리석음의 삼종 세트다. 어리석음의 인(因)이오 근(根)이다. 이로 인하여 반목과 시기, 질투를 유발하며, 고통을 일으킨다. 고(苦)의 원인이다.

이를 끊어 없애는 것이 지혜이다. 그 지혜는 연기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연기의 진리에서 우리는 고(苦)를 소멸할 수 있고, 그 마음을 바르게 가져갈 수 있다.

『소』에서 단견과 무지를 없애는 법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연기의 바른 혜(慧)의 칼로 장애의 덮개를 끊어 없애야 한다. 이것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지혜의 칼로써 단견(短見)과 무지(無知)의 덮개를 끊어 없애야 한다. 이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바르게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증득이며 고(苦)를 소멸하는 길이며, 바른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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