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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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5-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부처님오신날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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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5-03 13:58 조회 885회본문
우리가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콘텐츠 안에서 만나는 부처님은 굉장히 특별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선택받은 존재처럼, 때로는 신의 아들이라도 되는 듯, 초인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부처님은 그렇게 특별하고 유별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깨달음, 그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부처라는 이 단어는 붓다(Buddha)에서 유래하였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우리 식의 발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얻었고, 이 깨달음으로 인해 붓다, 즉 부처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0세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다음의 45년간이 부처로서 활동 기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45년간 쉼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전파하는데 애썼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불교문화라는 것도 형성되었습니다. 당시의 경향을 보면 종교를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이 불교에 들어오기보다는, 기성 종교에 이미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 불교로 전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불교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늘 1,200명 정도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천민부터 고위직 대신과 왕족에 이르기까지 출신계급의 폭이 넓고 다양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신분의 제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실제로도 귀의 후에는 부처님 안에서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신분이나 직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등 없이 서로를 대했습니다. 정말 그랬는지는 ‘우바리’ 일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뛰어난 10명을 꼽아 10대 제자라고 일컬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우바리’였습니다. ‘우바리’의 직업은 이발사였는데, 그때의 이발사는 천한 하층 계급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았습니다.
‘우바리’보다 더 늦게 부처 님의 깨달음을 만난 일곱명의 출신 계급은 왕자 였는데, 언제나 ‘우바리’가 일곱왕자 보다 더 나 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먼저 받은 이가 ‘우바 리’였던 까닭입니다. 이는, 신분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서 신분이 달 라짐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혈통으로 인해 무언가가 정해지 는 일은 없습니다. 신분으로 인한 벽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본인의 마음이나 행동으로 인해 신분이 정해질 수는 있습니다. 양반의 행동은 양 반을 만들고, 천민의 행동은 천민을 만듭니다. 부 처님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이러한 신념을 강력하 게 전파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인간은 모두가 다 평등하고 동일하다는 의견을 끊임없이 피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2,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도 모습은 어떤가요? 부 처님의 바람대로 되었나요? 여전히 엄격한 계급사회로 이루어져있고, 그로 인한 차별과 폭력 이 만연한 인도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인도 헌법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차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실제의 사회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의 귀천도 엄연히 존재하고 출신 환경에 따라 균등한 기회 분배에도 분명한 제약이 있습니다. 출발선이 다르고, 도달 가능한 도착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인도의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좌절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제가 불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출가하지 않았다면, 세속적인 안락함과 편안함을 마음껏 누릴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결코 자기 이익만을 도모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부처님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모든 여력을 쏟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애는 위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염려하고, 일생을 교화에 전념하는 위대한 삶을 살다가 80세에 열반에 듭니다. ‘열반에 드셨다.’ 우리는 이 표현을 보통 누군가 세상을 떴을 때 자주 사용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열반과 죽음에는 그다지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많은 번뇌를 가지고 있고, 이 번뇌들은 제각각 저마다의 작용을 합니다. 이를테면, 어리석음의 작용, 욕망의 작용, 분노의 작용, 질투의 작용 등입니다. 이와 같은 번뇌들이 없어지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초기 불교에 있어서 불교인들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자 이상향은 바로 ‘번뇌가 없는 상태’였지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 발을 딛고, 호흡을 하고, 음식물을 섭취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종교인이라고 한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호흡을 하지 않고, 음식물을 섭 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의미 안으로 활동을 줄이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늘 번뇌라는 것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자야 하는 의식주(衣食住)는 번뇌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한들, 깨끗한 마음만 남아있다고 한들 번뇌까지 완전히 소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어진다는 것은, 육체가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없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죽기 전에는 욕망이 없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 때문에 죽음 은 완전한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만, 불교의 최종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해탈’이라는 단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불교는 광범위한 지식보다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종교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고 계율을 잘 지켜야합니다.
바르고 좋은 습관을 익히는 것을 선계, 비뚤고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을 악계라고 하는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비롯되고, 건강한 육체는 선계가 쌓여서 만들어집니다. 정신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행동을 바르게 해야함을 명심해야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마음을 통일하는 정신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전념하는 것은 마음을 맑게 만들어줍니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바야흐로 지혜는 깨달음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와 함께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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