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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과 역사인식(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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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9-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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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칼럼리스트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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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9-02 14:13 조회 3,39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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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과 역사인식(Ⅱ)
2천년 뛰어 넘는 현대적인 경전, 불교는 과학과 가장 가까운 종교

서양 사상사에서 사회 전체, 나아가 생명계 전체, 우주가 유기적(有機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 체계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사회 이후에 비롯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여러 학문의 다양한 입장에 따라 총체성이나, 변증법, 상대주의, 구조주의,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자연과학에서는 상대주의,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이나 나비 효과, 초끈 이론 등의 용어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주장들은 동일한 이론적 배경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사고 유형으로 보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앞서 나열한 근대 이후의 다양한 주장들은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내용들과 불교의 연기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로 인식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양의 인식론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나누고 그 둘 사이의 인식 작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이나 사회는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관을 완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어떤 학설이 나오면 그 학설을 주장한 사람에 대한 정보도 함께 봐야만 보다 타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근대가 성립하는데 계몽주의 사상이나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의 영향을 들지만 근본적으로는 과학 혁명에 의해 근대의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여전히 과학과 신학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에, 근대 초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연을 탐구하여 거기에 내재하고 있는 창조주인 신의 섭리를 파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이 진전되면서 과학과 신학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신학은 세계와 우주를 설명하는 주도권을 과학에게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과학이 가치중립의 입장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주장은 현대 과학에서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과학자 또한 주관에 의해 오염되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주관에 의해 왜곡한다는 점이 밝혀졌지요. 현대의 과학 철학에 의해 제시된 인식 행위는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사회, 세계, 자연, 우주)에 가하는 영향력과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에게 가하는 영향력의 상호작용으로 인식행위가 이뤄진다는 주장은 불교의 인식론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인식론은 철학의 출발점이자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란 측면에서 불교가 과학에 가장 가까운 종교라는 평가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인식론은 인식주체인 안이비설신의의 6근(根)과 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의 6경(境)의 상호작용으로 6식(識)이 성립된다고 합니다. 6근과 6식은 존재하지 않고 그 둘의 상호작용의 산물인 6식만이 존재한다고 하여 이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작용에 의해서 임시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사실 이 세계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으로 나눈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할 뿐,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을 중심으로 한 현대 학문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반야심경의 “...안이비설신의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2천여 년 전의 낡은 내용이 아니라 가장 현대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경전인 셈입니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원리가 가장 잘 작동하는 분야가 바로 종교적 영역입니다. 그 대표적인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이지요. 이들 종교는 불교에 비해 매우 쉽게 피아를 구분하고 상대방은 선교의 대상 아니면 제거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유일신교도 그 안에서는 다양한 입장차이가 존재하지만 비신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로 나뉘고,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지만 그들 종교 안에서의 구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외부인이 보기에 사소한 차이 때문에 이들 종교들은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켜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종족이나 민족에 대해 절멸(絶滅)을 가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 종족말살)가 자행되었던 것이죠. 구체적 사례로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단의 섬인 테즈메니아인의 절멸이나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한국판 버전이 최근에는 전모 목사에 의해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만이 유일한 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종교에 비해 불교는 나의 신앙이 가장 좋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나의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연기론은 상의상존(相依相存)의 세계를 말하기에 그 출발점이 공존(共存)의 지평위에 놓여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는 적대적이지만 수많은 갈래의 인과 연에 의해 현재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기에 불가항력적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불교와 다른 주장을 펼치는 세력을 육사외도(六師外道)로 비판은 하였지만 그들을 절멸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불교는 자신을 공격하고 배제하려는 상대를 인정하고 공존해야만 한다는 지독한 모순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신을 절멸시키려는 상대를 해치지않는 방법으로 공존을 꾀해야 한다는 이 모순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저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욕(忍辱)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불교 경전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불교도들에게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고 이해하도록 그들의 경전도 공부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지요. 불교를 공격하는 이들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불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전달하여 회심하도록 유도하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공존의 논리가 싹트도록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믿음을 절멸시키려는 의도로 전법(傳法)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전법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니 불교인은 끊임없이 정진하여야만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이 참 고달픕니다.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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