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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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8-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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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8-05 13:15 조회 3,819회본문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8)
계심(械心)
중생의 마음을 계심(械心)이라 한다. 계심은 형틀의 마음이다. 왜 형틀의 마음이라 하는가?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계심이라 하는가? 두 발이 그친 것처럼 머무는 것을 성품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얽매어있는 마음이 계심이다. 구속되어 머물러 있는 마음이다. ‘손 묶는 것을 쇠고랑이라 하며, 발에 차는 것을 차꼬[械]라 한다. 사람이 차꼬를 차고 있기 때문에 두 발이 멈추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언제나 단정히 앉기를 좋아하고 적연하게 머물러서 선정의 마음을 닦으며 법의 뜻을 관찰하면서도 이것에 구속되기에 차꼬의 마음이라고 이름한다.’ 머물러 스스로 구속하는 마음이 계심이다. 계(械)는 형벌을 내릴 때 사용하는 도구다. 두 개의 기다란 토막나무 틈에 가로로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그 구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형틀, 수갑의 일종이다.
이렇게 손이나 발을 수갑으로 채우면 꼼짝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마치 수갑을 채운 것처럼 한 생각에 갇혀 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이르는데, 저 언덕이 아니라 뗏목에 오히려 연연하고 거기에 얽매이는 마음이다.
뗏목을 버리지 못한 마음이다.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고요하고 자유자재한 걸림 없는 마음이다.
『소』에 이르기를, ‘차꼬의 마음을 다스리는 행은 모든 때와 장소에서 사유하고 수습하여 고요한 선정에 들어 들고남이 없게 해야 한다. 이것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법구경』에서도 걸림 없는 마음을 강조하였다. ‘허공에는 바퀴의 흔적 없듯이 수행자의 마음은 다른 뜻 없네. 사람들은 세속의 악을 즐기나 깨친 자는 마음에 때가 없도다.’ 허공과 같은 마음이 계심(械心)을 다스리는 마음이다.
운심(雲心)
중생의 마음을 운심(雲心)에 비유하고 있다. 운심이란 구름의 마음이다. 어떤 마음인가? 『대일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을 구름의 마음[雲心]이라 하는가? 언제나 비 내리려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구름은 항상 비를 머금고 있다. 구름이 끼었을 때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 근심과 걱정으로 고(苦)를 지닌다. 반대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락(樂)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런 마음은 늘 일비일희(一悲一喜)하여 고락(苦樂)으로 천착하게 된다. 피곤하고 고단한 삶이다. 이를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인도의 여름철 석 달 중에는 장맛비가 특히 심하여 언제나 막혀 있고 어둡기 때문에 당시의 풍속에서는 삼가고 깊이 생각하는 마음에 금하는 것이 매우 많다. 그래서 비가 내릴 때는 사념(思念)한다고 하였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운심(雲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불과하다. 뗏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굳이 뗏목을 힘들게 짊어지고 가서는 안 된다. 마치 비를 내리는 운심(雲心)을 화창한 햇살로 걷어내는 것과 같이하여야 한다. 이를 『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 내릴 때 사념하더라도 깨치고 나면 곧 사심(捨心)을 행하여 세간의 근심과 기쁨을 여의고 법의 기쁨에 수순해야 한다. 이것이 운심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심(捨心)은 버리는 마음이다. 즉 마음이 언제나 평온하고 집착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근심과 걱정,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도 집착하는 중생의 마음을 이렇게 설하였다.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다. 그러므로 함부로 짓지 말아야 한다. 아무렇게나 지어서는 안 된다. 함부로 아무렇게 짓는 그 마음을 없애야 한다. 막행막식하지 말아야 한다. 운심(雲心)을 사심(捨心)으로 바꾸어야 한다.
전심(田心)
중생의 마음은 전심(田心)이다. 전심은 밭의 마음이다. 어떤 마음인가?
『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밭의 마음(田心)이라 하는가? 항시 자기 몸만 닦는 것을 말한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좋게 보면, 자기 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보면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자신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이다. 전(田)은 밭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생각나는 말이 있다. 비슷한 뜻으로서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다. 내 밭에만 물을 끌어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처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전심(田心)은 바로 그런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좋고 기름진 밭이 있으면 언제나 다듬고 갈고 개간하여 잡초를 제거하며 갖가지의 방편으로 청정하게 하듯이 이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언제나 그 몸을 닦는 것만 좋아하며 향과 꽃과 맛있는 것 등으로 뿌리고 바르며 봉양하여 힘써서 빛나고 깨끗하며 장엄하여 좋게 한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 보인다.
밭을 갈고 다듬고 잡초를 제거하고 여러 방편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몸을 닦고 향과 꽃 등으로 꾸미고 장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여기에 집착하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기만 하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얼굴을 가꾸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고 마음의 전부일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주객이 전도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는 형국이다.
그래서 『소』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을 깨닫고 나서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공들여 닦는 마음을 돌려서 모든 공양의 도구로써 복전(福田)에 파종하여 심고 훌륭한 과를 얻도록 하겠노라.’
이는 아전인수의 마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이타심(利他心)으로써 이타행(利他行)을 행하는 것이다. 전심(田心)은 이기심(利己心)이오, 복전(福田)에 파종하여 심고 훌륭한 과를 얻으려는 마음은 이타심(利他心)이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열반을 넘어 다른 이를 위한 이타심, 이타행이다. 이것이 선심(善心)과 선행(善行)이오, 또한 자비심(慈悲心)과 자비행(慈悲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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