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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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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1-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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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1-06 13:46 조회 2,9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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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밀교문화와 생활 (46회)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21)

수생심(受生心)

수생심(受生心)이란 무엇인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상태에서 그 생(生)의 행업(行業)을 수습(收拾)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뜻인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다음의 설명을 살펴보자.

‘마치 어떤 사람이 백업(白業)과 흑업(黑業)에 따라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는 것처럼 갖가지로 다양하게 짓는 것에 따르기 때문에, 저 무량한 차별의 몸을 받는 것과 같다.’

즉 선을 지으면 선이 따르고, 악을 지으면 악이 따른다는 인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백업(白業)은 선업을 말하는 것이고, 흑업(黑業)은 악업(惡業)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말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인고과(善因苦果) 악인고과(惡因惡果)이다. 선한 백업(白業)을 지으면 즐거움[樂]이 따르고, 악한 흑업(黑業)을 지으면 괴로움[苦]이 따르는 것이다. 연기법의 틀림없는 진리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緣起法)으로써 이를 시설하였고, 사성제를 통해 괴로움의 소멸을 강조하였으며, 십업설(十業說)로써 선업(善業)과 백업(白業)의 수행과 실천을 역설하였다.

과보는 업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업을 잘 지어야 한다. 좋은 인(因)을 짓고 선한 연(緣)을 맺어야 한다. 업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즉 육근(六根)과 오온(五蘊)이 핵심이다.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그 업의 과보가 따른다. 따라서 바깥 경계의 외경(外境)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수생심은 바로 그러한 업의 과보를 말하고 있다. 내가 지어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받아서[受] 일어나는[生] 것이다. 그래서 수생(受生)은 즉 연기(緣起)와 같은 말이다. 연하여[緣] 일어나는 것[起]이 곧 받아서[受] 일어나는 것[生]이기 때문이다. 연(緣)이 되었든 수(受)가 되었든 참으로 잘 지어야 한다. 잘 지어야 좋은 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닦았던 모든 수행을 전부 수생(受生)에 회향하고자 한다. 과를 얻음에도 역시 선과 악을 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선과 악을 잘 선택하여 선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순수한 백법(白法)을 닦으며, 이 선 가운데에 있어서도 또다시 혜(慧)로써 거친 광석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차례대로 하면, 이에 순일(純一)하고 청정한 제호(醍醐)의 오묘한 과보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다스리는 방법이다.’

위에서 ‘모든 수행을 수생에 회향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인과법을 철저히 따르겠다는 뜻이다. 모든 수행은 인과와 연기법에 기초한다. 수행이 인(因)이오, 과(果)가 해탈 열반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없으면 과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수행의 인과와 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果)에는 선과(善果)와 악과(惡果)가 있으므로, 선과 악을 잘 선택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선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순수한 백법(白法)을 닦으며, 이 선(善) 가운데에 있어서도 또다시 혜(慧)로써 거친 광석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이 곧 계(戒)이다. 계는 제악막작(諸惡莫作)을 가리킨다.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受生)의 수행은 계를 지키는 것이 된다. 또 ‘순수한 백법(白法)을 닦는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닦는 것이오, 그 닦음은 결국 정(定)의 이름이다. 순수한 백법으로써 선정에 드는 것이 수행이다. 따라서 수생의 수행은 계를 지키고 선정에 드는 것이다.

또 ‘선(善) 가운데에 있어서도 또다시 혜(慧)로써 거친 광석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계(戒)와 정(定)으로써 선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였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안 된다. 지혜가 없는 수행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다. 지혜라고 할 수 없다. 마치 모래 위의 성과 같은 것이다. 어느 것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가 바탕이 되고 또 끝이 되어야 한다. 지혜의 닦음은 시작이고 종착역이다. 

그런데 ‘혜(慧)로써 거친 광석을 제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친 광석은 악업(惡業)이오, 일체고(一切苦)이며, 무명(無明)이다. 이를 제거함이 지혜의 증득이다. 지혜는 밝은 빛과 같다. 백업(白業)과 선업(善業), 일체락(一切樂), 명(明)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은 지혜로써 거친 광석을 제거하는 것이다. 악업을 짓지 않고 일체고를 여의는 것이다. 그 길은 지혜를 닦는 것이다. 지혜를 닦는 것이 수생심(受生心)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원후심(猿猴心)

원후심(猿猴心)이란 원숭이 마음이다. 그 마음은 어떤 것인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원숭이의 성품은 몸과 마음이 산란하여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중생의 산란한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는 다른 경전에서도 엿보인다.

『열반경』의 내용이다. ‘마음은 경망하고 조급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분주하게 달리는 것이 악한 코끼리와 같고, 생각이 빠르기가 번갯불과 같으며, 머물지 않고 요란하게 날뛰는 것이 마치 원숭이와 같으니, 이런고로 모든 악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머물지 않고 요란하게 날뛰는 것, 몸과 마음이 산란하여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이 원후심(猿猴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를 원후심(猿猴心)이라고 하는가?『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그 성품이 성급하게 움직이고 불안하기 때문에 연(緣)에 자주 끄달린다. 마치 원숭이가 하나의 가지를 놓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대체로 중생은 모두 그러하다.’

성급하고 불안하여 업을 짓고 또 업을 짓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가지를 잡고 이동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원숭이에 빗대어서 원후심이라 한 것이다. 이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흩어지는 생각에 따르지 않고 연(緣)을 하나의 경계에 묶으면, 이것이 다스리는 방법이다. 마치 원숭이를 기둥에 묶어놓으면, 다시 방자하게 발돋움하여 뛰어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마음을 전일하게 다스리는 것이 원숭이의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다. 이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육근(六根)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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