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의불교(格義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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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1-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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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1-05 09:27 조회 3,286회본문
중국 전래 초기 도가 사상으로 불교를 설명 · 불교와 노자, 비실재론적 세계관 서로 닮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많은 경전이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승려가 중국인 승려의 도움을 받으며 번역한 것을 구역(舊譯)이라고 하고, 중국인 승려가 서역으로 가서 직접 경전을 연구하고 돌아와 번역한 경전을 신역(新譯)이라고 합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승려가 구마라집(鳩摩羅什, 서기 344~413 또는 350~409)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승려가 현장(玄奘, 602~664)입니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생소한 불교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도가(道家)의 용어를 빌어다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불교를 이해하는 것을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합니다. 도가 계통과 불교의 교리 내용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유교는 이성을 중시하는 성향으로 인해 서양의 계몽주의와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reason, rationality의 번역어가 이성(理性)인데 이(理)는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말하는 이(理)에 해당합니다. 요즈음 근대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보완 내지 대안으로 불교와 더불어 노자의 도덕경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은 우리가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불교신자들에게도 필독서로 인식되고, 도덕경을 통해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덕경의 첫 장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해석을 놓고 크게 두 개의 주장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번역한 것에 대하여 ‘영원한’에 해당하는 상(常)의 해석에 대해 ‘늘 그러한’이라는 해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분이 바로 도올 김용옥 선생입니다. ‘영원’이란 궁극의 불변적인 것을 전제로 한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은 번역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아시아적 사상에서는 세계의 본질을 변화, 즉 가변(可變)적 세계로 이해하는 것과 서로 충돌한다고 합니다. 서구 사상의 원류인 플라톤의 이데아는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고 이것은 기독교의 교부철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로 설명하는데 이는 초기의 원자론에 해당합니다.
동아시아 사상에서 세계의 본질은 변화로 보고 있습니다. ‘목화토금수’의 오행(五行)은 행(行)이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4원소 설’처럼 불변의 네 원소의 조합으로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생상극(相生相克)의 변화의 산물로 이 세상을 설명합니다. 이는 불교는 무상(無常)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그래서 ‘도가도 비상도’에서 상(常)은 영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 ‘늘 그러한’것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라는 해석은 근대이후 서양의 영향으로 빗어진 번역이라는 것이 도올 선생의 주장입니다. 영원한 도란 불변적인 것을 말하고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일신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도덕경을 서양의 유일신 사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빛의 성질을 설명할 때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전자가 실재론(實在論)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비실재론(非實在論)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비실재론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사상이라면 노자와 불교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치유하는 사상으로서 노자의 사상이 제시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노자의 사상이 종교로서의 기능을 거의 하지 않고 있기에 현존하는 어떤 기성 종교와도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는 기성종교로서의 정체성이 강하여 미래사회의 중요한 요소로서 수용되어야 하지만 타 종교의 저항감이 큽니다. 그 대안으로 노자의 도덕경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죠. 불교인들이 노자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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