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예배의 대상, 제불보살님과 내가 하나 되는 수행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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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3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4-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4-09 14:25 조회 934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1절 밀교란 무엇인가
6. 만다라(曼茶羅)의 기초지식(基礎知識)
만다라는 한역(漢譯)으로 구역(舊譯)에서는 단, 신역(新譯)에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 취집(聚集)으로 역하고 단(壇)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시대와 함께 점차로 통합하게 되었다. 인도의 만다라에 대해서는「일자불정윤왕경(一字佛頂輪王經)」과「만다라경(曼茶羅經)」등에 ‘금강지(金剛智)와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시대(時代)에 인도의 그림으로서 만다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보존된 것이 없다.
일반으로「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대정장제大正藏第 28권 813-6)」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흙을 돋우어 단(壇)을 모으고 향니(香泥)를 바른 다음 그 위에 만다라를 그린 것인데 이것을「토만다라(土曼茶羅)」라고 한다. 그 작법은 칠일작단(七日作壇)이라고 하여 최초에 계선(界線)을 그어서 최후에 아사리(阿闍梨)가 존상(尊像)을 그려 모실 때까지 7일이 걸린다. 만다라가 되면 거기서 엄숙한 관정의식(灌頂儀式)도 행하고 식재(息災)나 증익불공(增益佛供)도 한다. 불사가 끝나면 만다라는 곧 헐어버리는 것이 통례나, 이러한 토만다라(土曼茶羅)는 수법(修法) 때마다 만들었다 헐었다 하는 것이 번거러우므로 결연관정(結緣灌頂) 때 투화득불(投華得佛)에 쓰기 위해서 부만다라(敷曼茶羅)를 만들어서 현재도 일본에 남아 있다. 최고의 예는 일본국 동사(東寺)에 현존하는 채색본으로서 세로의 길이가 280㎝의 큰 것이다.
양계만다라(兩界蔓茶羅)는 대일경(大日經)에 의한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와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의한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의 두 가지가 있다. 대일경은 7세기 반경에 서남인도에서 성립되었으며 금강정경은 남인도에서 8세기 초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태장계만다라는 대일여래의 이법신(理法身)을 표현하여 불(佛)의 대비(大悲)를 태장(胎藏)에 비유한 생명 그 자체의 세계관이다. 12대원(大院-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 변지원遍智院, 지명원持明院, 금강수원金剛手院, 관음원觀音院, 석가원釋迦院, 문수원文殊院, 제개장원除蓋障院, 지장원地藏院, 허공장원虛空藏院, 소실지원蘇悉地院, 최외원最外院)으로 되어서 414존(尊)을 모시고 있다.
금강계만다라는 일본의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는 구회만다라(九會曼茶羅)를 쓰고 천태밀교(天台密敎)에서는 성신일회(成身一會)의 만다라를 쓰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구회(九會)는 천축수의(天竺隨宜)의 설(說)이라고도 한다. 대일여래의 지법신(智法身)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금강(金剛)은 각오한 지혜의 신체가 견고하여서 모든 물체를 쳐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구회(九會-성신회成身會, 삼매야회三昧耶會, 미세회微細會, 공양회供養會, 사인회四印會, 일인회一印會, 이취회理趣會, 강삼세갈마회降三世羯磨會, 강삼세삼매야회降三世三眛耶會) 만다라는 1,461존(尊)을 모시고 있다. 만다라 제작을 최초로 기술한 책으로는「성령집(性靈集)」이란 책 7권이 있다.
만다라 중에는 별존만다라(別尊曼茶羅)와 신통미술(神通美術)의 만다라도 있다. 밀교에는 현세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수법(修法)에 네 가지(식재息災, 증익增益, 경애敬愛, 항복降伏)가 있다. 한재(旱災), 홍수(洪水), 지진(地震) 등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부터 치병(治病), 화재(火災), 장수연명(長壽延命), 번영(繁榮), 원적퇴산(怨賊退散) 등의 소원(所願)을 이루기 위하여 개별본존(個別本尊)이 필요하였다. (이하 별존만다라 내용 중략)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한 만다라관 및 법신불(法身佛)의 체(體), 상(相), 용(用), 밀교(密敎)에서는 우주와 인간과 모든 삼라만상의 구성요소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라고 간주(看做)하고 모든 성주괴공(成住壞空)은 모두 육대연기(六大緣起)로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전체를 법신불의 당체라고 본다.
이러한 육대연기로서 변화하는 상(相)을 통칭하여 하나의 실존만다라(實存曼茶羅)라고 보며 그것을 넷으로 나누어 사만(四曼)이라고 하고 법신불(法身佛)의 활동상(活動相) 즉, 삼밀(三密)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하 사만다라 내용 중략)
이 사만을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의 상(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여래의 삼밀(三密)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다라에 모셔져 있는 존상의 명호와 이를 설명하는 각종 용어들은 매우 낯설고 어렵다. 불교학자도, 불교미술 전문가도 아닌 이상, 몇백 혹은 몇천의 불보살님들을 일일이 알기란 쉽지 않다. 그분들의 구도 여정과 원력과 교화 방편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지금 당장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책 저 책 뒤져 정리라고 해봤자 우습기만 할 것 같아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다만 느끼는 대로 몇 가지 단상을 이야기해 본다.
일반 사찰에는 법당마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모셔진다. 대웅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혹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대적광전에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을 모시며, 그밖에 극락전, 원통전, 미륵전, 약사전, 명부전 등에 불보살님을 모셔 그분들의 원력과 이상세계를 구현한다. 이렇게 볼 때 만다라는, 사찰에 있는 모든 법당을 모아놓은 셈이니 하나의 대가람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란다사에서 대소승과 밀교를 배워 중국에 순수밀교를 전한 선무외 스님과 금강지 스님을 통해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번역·소개되면서부터 밀교의 교리와 실천 체계, 그리고 만다라와 관정 등의 수행의궤를 갖추게 되었다. 진리의 본질이자 최고의 것을 모두 갖췄기에 원만구족, 윤원구족이라 이름하는 만다라를 선무외 스님은 ‘여래의 진실 공덕이 한 곳에 모인 것’이라고 했다. 만다라에는 대일여래를 비롯해 석가모니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 등의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등의 보살님, 그리고 팔부중과 명왕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모셔진다. 이는 대일여래의 지혜와 자비와 공덕에 공양 올리는 의미이고 그 보리심과 실천을 도와 중생교화에 다 같이 헌신한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모든 존재가 곧 부처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극히 예배드리는 대상이자 불보살님과 내가 하나 되는 수행의 장이다. 만다라를 관상함으로써 불보살님의 덕과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여 중생을 돕고 이끌겠다고 발심하는 계기가 된다. 만다라는 제불보살님이 계신 곳이고 설법하는 곳이니 그 한 분 한 분의 공덕과 의미를 배운다면 자연스럽게 팔만사천 경전 말씀을 배우게 될 것이다. 관상수행과 함께 밀교만의 특별한 의식이 관정의식 때 행하는 투화득불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를 맹세하는 순간, 꽃을 던져 만나는 한 분의 불보살님을 나만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한 분을 멘토로 삼아 수행한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바라보고 여쭙고 배울 수 있을 것이며 그 가피는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또 하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기는 건 만다라를 정성껏 조성한 다음 다시 허무는 전통일 것이다. 주로 모래로 많이 하는데 오색의 모래로 한 알 한 알 완성한 만다라는 그야말로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만다라를 다시 흩어 버리다니 아쉬움을 넘어 허무하기까지 하지만 무아와 공의 진리를 보여주고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이다. 그렇게 흐트러진 모래들은 강과 호수로 떠내려 보낸다. 모래에 깃든 공덕과 발원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가기를 바라는 것이라 한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만다라를 더 빛나게 해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만다라를 조성하고 회향하는 모든 과정이 그대로 하나의 법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넓어지는 원’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물론 그다음에는 신의 주위를 오랜 동안 돌고 있다는 글이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구절인 ‘내가 매인가, 폭풍우인가, 아니면 위대한 노래인가?’ 이 대목에 이르면 신을 향하든, 부처님을 향하든, 진리를 향하든, 바라보고 추구하는 모습 그 자체가 되어가는 삶의 여정을 떠올리게 된다.
선무외 스님은 만다라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보문(普門)에 나아가게 한다’고 했다. 관상수행으로 불보살님과 같은 빛을 마음에 담고 투화득불로 불보살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간다면 내가 그려가는 만다라도 점점 크고 원만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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