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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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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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2-03 13:32 조회 3,071회본문
몸과 마음은 서로 연관, 활발함과 고요함의 균형이 중요... 신심, 노력, 지혜, 고요함, 알아차림으로 통찰지 생겨나
“어리석은 사람이
‘고요하다’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고요해도
고요한 줄 알지 못한다.”
저는 미얀마에서 수행하면서 무상과 무아에 대한 이해가 어렵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고’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의 스승께서는 지혜가 약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계속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혼자 야외에서 경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어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알아지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알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아는 것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마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지겹다!’ 이러한 계속된 존재의 이어짐이란 것이 ‘참으로 지겨운 것이다’란 것이 한 순간 ‘확’ 알아졌습니다. ‘지겹다.’라고 하는 마음은 일반적으로 ‘화’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화가 그것을 안 것이 아니라 지혜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일어나는 것, 존재하는 것이 전혀 바랄 바가 아니다 라는 것이 마음에 아주 명확했습니다. 그런 앎으로 인해서 마음이 밝아지고 깨끗해졌고 행복해졌습니다. 지혜로써 존재하는 것이 지겹다라고 깨달은 순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절대의 평화, 절대의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그 때 존재가 ‘지겹다.’라고 이해한 마음이 바로 ‘고’에 대한 이해의 마음입니다. ‘고’에 대한 지혜가 있을 때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자신의 원인과 결과로 인해 열반을 향해 간다라고 스승들은 이야기 합니다. 붓다께서도 경전에서 존재에 대한 열정이 모두 식은 마음이 고통의 끝, 열반을 향해간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흔히들 ‘사마디’를 집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마디는 집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디는 마음의 고요한 성질입니다.
그러한 고요함을 가져오는 원인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명상’을 통한 고요함이고 또 하나는 ‘지혜명상’을 통한 고요함입니다.
집중명상은 하나의 대상에 끊임없이 마음을 두어가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계속적으로 마음을 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그 대상과 밀착합니다. 밀착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 이 마음은 다른 마음작용들을 누르게 됩니다.
생각하는 마음작용, 느낌 아는 마음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들어오는 정보가 줄어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이런 고요함을 ‘아빠나 사마디’, 집중명상을 통한 고요함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명상에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꽃과 오물이라는 시각적 대상이 있을 때 꽃과 오물이라는 것은 관념적 해석일 뿐이고 실재는 보일 뿐이란 것을 이해해갑니다. 이 두 가지가 보인다는 실재하는 성질로써는 같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보인다는 실재하는 성질은 같다 라는 이해를 가지고 꽃과 오물을 보게 되면 꽃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오물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이런 고요함을 ‘까니카 사마디’, 지혜명상을 통한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대상을 바르게 보기 때문에 생기는 고요함입니다. 이런 고요함이 있을 때는 그 고요함과 더불어 마음의 활발함도 함께 있습니다. 대상을 자유롭고 가볍고 활기차게 알아가지만 대상에 대한 견해가 바르기 때문에 마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단지 대상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은 고요합니다. 이렇게 고요함과 활발함이 함께 균형있게 개발되어갑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진정 좋은 마음은 균형이 맞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균형을 이룬 마음에서 지혜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요함은 수행에서 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 중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지면 대체로 그 상태를 좋아합니다.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체험하고 반복적으로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에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내적 경향이 생겨납니다.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내적 경향이 있고 조건이 형성되면 마음이 스스로 그런 고요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얀마에 있을 때 비가 오면 수행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가 왔고 수행상태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비가 오니까 수행이 안 되는구나. 공기가 습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비가 우기 동안 계속 왔고 이런 생각을 반복적으로 계속 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그 생각을 믿기 시작비가 오면 수행이 안 된다는 것이 내 마음에 굳게 프로그램된 것입니다.
10월이 되었고 비가 그치고 해가 떴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져서 수행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에 법당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수행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때 천장에서 ‘툭, 툭’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이 그 순간 ‘비가 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는 순간 마음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안 순간 마음이 자신에게 프로그램된 대로 자신이 알아서 마음의 상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질에 따라 조건이 되면 자신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 마음이 고요하다 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고요함의 반대되는 힘인 마음의 활발함을 체크해주십시오.
마음이 얼마나 깨어있는지, 마음이 얼마나 활발한지, 대상을 얼마나 많이, 분명히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주십시오. 마음의 활발함이 약하다 라고 생각되면 질문과 조사를 통해서 마음의 활발함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의 활발함이 키워지지 않으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걸으면 몸이 활발해지고 몸이 활발해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활발해집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행센터에서의 수행 시간표에 좌선과 경행을 교대로 두는 것은 바로 마음의 활발함과 고요함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좌선 중 고요하다라고 느껴졌다면 이미 마음의 균형은 무너졌습니다. 수행 중 좋은 마음의 성질들이 함께 균형 있게 개발되면 어느 한 가지 성질이 두드러지게 알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활발함의 힘이 커지면 고요함의 힘도 함께 커져서 서로를 제어해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게 합니다. 지혜의 힘이 커지면 신심의 힘도 함께 커져서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게 합니다.
통찰의 지혜가 날 때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는 마음의 상태가 아주 평범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 때 마음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마음의 요소들, 신심, 노력, 지혜, 고요함, 알아차림의 힘들이 함께 균형 있게 개발되어 어느 하나도 두드러지지 않아서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더 깊은 통찰지가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미얀마에서 스승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고요하다, 평화롭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수행하면서 고요하다 라고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승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지혜가 작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고요하다 라고 느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고요하다 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고요해도 고요한 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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