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유루종자와 무루종자

페이지 정보

호수 257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4-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법선 정사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4-02 14:22 조회 3,221회

본문

연재글: 심뽀이야기 (18회)

유루종자와 무루종자

산스크리트로 유루(有漏)는 사스라바(sasrava), 무루(無漏)는 아나스라바(anasrava)이다. 루(asrava)는 더러움․ 번뇌라는 뜻이며, 따라서 본래 유루란 번뇌에 오염된 것, 무루는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것을 뜻한다. 


유루·무루(有漏·無漏)


종자는 범어 bija의 번역이다. 씨앗으로부터 싹이 나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믿음의 씨앗’ ‘원인의 씨앗’등 종종 비유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아뢰야식 가운데 선척적으로 존재하는 본유종자가 있고 후천적으로 경험하고 축적한 신훈종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자에는 유루의 여러 현상을 일으키는 유루종자가 있고, 보리의 원인이 되는 무루종자가 있다.


아뢰야식에 있는 무루종자(無漏種子)는 모든 유정들이 본래로 지니고 있는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무루종자는 일반적인 선과 악업 종자와는 달리 아뢰야식의 청정무구한 진여성에 보존된다. 그러나 무루종자라 할지라도 수행에 의한 반복적인 훈습이 있지 않으면 현행할 수 없게 된다. 


유정들은 유루의 번뇌성에 집착하여 유루종자만이 아뢰야식과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인과를 지속하고 있으며, 무루종자가 나타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아뢰야식에 무루종자가 보존되어 있어서 본성은 무루종자일지라도 유정들의 번뇌에 의하여 유루종자만이 현행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무루종자가 나타날 때까지 주로 유루종자와 관련하여 역할을 하게 된다. 


종자 훈습의 종류


유식논쟁에 하나가 종자(種子)의 유래에 대해 묻는다. 종자는 본래부터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는 없던 것이 훈습에 의해 새롭게 생겨난 것인가? 이 논쟁은 과거 호월(護月), 난타(難陀), 호법(護法) 논사(論師)들이 종자가 훈습되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본래부터 종자가 있다는 본유설(本有說)이 있고, 종자는 항상 새롭게 훈습된다는 신훈설(新熏說)이 있으며, 본유의 종자도 있고 신훈의 종자도 있다는 합성설(合成說)도 있다. 


세 명의 논사 가운데 호월은 유루(有漏)·무루(無漏)를 막론하고 그 어떤 종자도 훈습에 의해 새로이 조성되는 것은 없으며, 예외 없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호월 논사에 의하면, 현행의 훈습을 통해서는 단지 기존의 본래부터 있던 종자의 증장(增長)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에 반해 난타 논사는 유루·무루를 막론하고 종자는 모두 훈습으로 인해 생겨난다고 한다.


본유설의 한계


본유설은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은 아뢰야식에 본래부터 종자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새로 조성된 것이 아니며, 보존된 종자에 의하여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본래부터 우리들에게 무루종자가 없다면 누구도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본래로 종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유설은 불변하는 종자의 지속적인 작용성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현행에 의하여 새롭게 생기는 종자를 부정함으로써 선악이나 수행의 과보로 나타나는 결과를 수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신훈설과 합성설


신훈설은 종자는 원래 훈습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종자의 모습이 새롭게 생기는 것이라 주장한다. 본래부터 종자가 있다면 업력이 고정되어서 더 이상의 진보가 있을 수 없게 되며, 항상 새롭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무루종자 역시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의하여 점차 무루의 훈습이 지속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없던 무루종자가 새롭게 생긴다는 점에서 설명의 한계가 보인다. 


합성설은 본유설과 신훈설을 합한 것으로, 본래부터 저장되어 있는 종자가 있고, 새롭게 훈습되는 종자도 있다는 것이다. 본래부터 저장되어 있는 종자는 무루종자와 같은 근원적인 것과, 이생에 태어 날 때에 전생에서 가지고 오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새롭게 훈습되는 종자는 현행을 통하여 훈습되는 것을 말한다. 


본유와 신훈의 종자를 모두 인정함으로써 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