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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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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8-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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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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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8-06 14:54 조회 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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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흔적

수행을 통해 가르침을 증득

불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


유교와 불교의 이해에 깊은 흔적을 남긴 한형조 교수가 얼마 전에 입적하였습니다. 그의 책을 통해 유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고 특히 그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은 휼륭한 불교 입문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금강경 해설서인데 이 또한 뛰어난 저술로 생각합니다. 한형조 교수는 철학과에 입학하여 마주한 교과과정이 서양철학 위주로 짜여져 있는 것에 실망하여 스스로 불교과 유교를 탐구하였습니다. <왜 동양철학인가>라는 책은 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을 마련해준 책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서양 철학은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도로 점철되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유대교 계통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주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세계의 기원을 인간의 내부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탐구의 방향이 내면으로 향하는 것은 인간 진화의 과정과는 충돌됩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세상을 살피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불교는 늘 진리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왔습니다. 즉 자아에 대해 무아를 말하는 불교는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주장하는 흐름이 있어왔는데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대응의 결과 불교 교리의 큰 줄기가 연기에서 중관의 공으로 유식으로 변화해왔고, 중국으로 건너간 불교는 화엄종, 천태종과 정토종의 종파 불교를 낳고 궁극적으로는 선(禪)에 이르렀습니다. 불교의 이런 흐름을 보면 다른 종교와 달리 교리 변화의 진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형조 교수는 이러한 사정을 아주 명쾌하게 정리하였는데 이를 오중(五重)의 관문(關門)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관과 세계를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애써 진리를 설파한 후 불교는 교리를 아는 것을 넘어서 경험, 즉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증득(證得)한 후 그 가르침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교리는 단지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불과한 것이고 강을 건너면 버려야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파격이 드러납니다. 타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온갖 분야에 강제하여 오로지 한 맛으로 덮어버리려고 하는데 불교는 불교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불교적인 것과 불교 아닌 것의 경계가 무너지게 됩니다. 오히려 불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살불살조(殺佛殺祖)가 나오기도 한 것이지만... 한형조는 이를 경허 대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고 말에서 해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


집성제(集聖諦)에 대한 설명에서 고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집(集)을 단지 집착(執着)으로 번역하지만 한형조 교수는 집(集)은 모였다는 의미로 여러계기가 모여 즉 연기(緣起)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러조건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소멸될’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불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생사(生死)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마치 기독교의 영생을 떠올리는 느낌이 들어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으로 영생은 불가능하기에 천국을 따로 설정하고 죽어서 가는 곳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가 없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영생과 다릅니다. 


대승기신론의 “마음이 일어나면 수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마음이 꺼지면 수많은 세계가 사라진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는 이 세계 또한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오해해서는 않되는 것이 서양 철학의 관념론과 혼동하는 경우입니다. 인간이 ‘나’의 관념에 의해 이 세계가 실재할 뿐이라는 주관적 관념론이나 신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객관적 관념론 둘 다 불교의 세계관과 다릅니다.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는 유물론과도 다릅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의 소멸을 벗어나려고 수많은 욕망을 펼치지만, 결코 생사의 순환 고리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입장에서 세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에 시작과 끝을 설정하고 사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식(識)에 의해서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재단하는 ‘나’만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욕망이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순환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인간이 이것을 생사로 끊어놓고 스스로 불안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형조 교수의 글에서 느낀 점을 나름의 단견(短見)으로 말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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