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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을 밝히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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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8-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법문 서브카테고리 이달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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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보현 전수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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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8-04 14:48 조회 2,6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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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을 밝히는 가르침
염송정진으로 본질을 꿰뚫어 이치를 깨우쳐, 자신의 습성과 기질을 바꾸는 것이 곧 수행

우리가 밀교에 들어와서 7년을 지난 후에 오늘에 와서 그동안 7일간씩 삼밀로서 정진해 오던 길을 돌아보면

7일 정진 중에 일어난 마장은 다 법문으로서 행자의 인격을

완성하는 방법이 되었으며 인간을 개조하는 방법이 되었으며

몸과 마음을 시련하여 금강같이 견고하게 하는 방법이 되었으며

난행 고행을 실행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애착이 화해서 평등한 마음이 되게 하였고

탐심이 화해서 단시하는 마음이 되게 하였고

진심이 화해서 화합하는 마음이 되게 하였고

어리석은 마음이 화해서 지혜가 밝고 인과를 아는 마음이

되게 하는 도량이 되었던 것이니 49일 정진 중 당체설법(當體說法)보다 더 좋은 법문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종조법설집」 109쪽


종교는 절대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히 여겨 그 뜻에 따라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바라는데서 기원하였습니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자의 힘을 믿고 따르며 그에 응당한 대가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강요해오며 절대적 신에게 의존해왔습니다. 그에 수반되어 오는 극심한 피해와 그런 맹목적인 믿음에서 얻어진 행복의 무상함에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는 질적 변화와 변천을 거듭합니다.


현대의 종교는 모두 정신적 수양을 중히 여깁니다. 무조건적인 맹신이 아닌 수행을 통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신심을 강화하여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적 수행만을 강조하며 염송정진을 몇 시간 하였네, 보시를 얼마를 하였네, 이것을 이루었네. 저것을 이루었네 등 구하고자 하는 바와 얻고자 하는 면에만 치우쳐 가기도 합니다. 이런 수행은 현실 생활의 변화무쌍한 번뇌에 속박되어 도리어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오욕육진 한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늘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의 의도를 확연히 하여 염송정진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치를 깨우쳐 자성 안에서 답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하여 자재함과 편안함을 얻어야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상에 집착하여 망상을 흩날리면서 고통을 더 가중해서는 안 됩니다. 번뇌와 고통은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데서 옵니다. 

일반인은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나’이고 내가 자신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이 ‘주인’은 인생의 희로애락에 종이 인형이 잔잔한 바람에도 휘날리듯 휘날리고, 종일 번뇌가 끓이지 않아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주위환경이 시시각각 바뀌니 혼란스럽지 않게 바뀜을 거부합니다.


좋은 것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데서 티끌 없던 자성은 빛을 잃고 어두워져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듣지 못하여 오해와 착각을 거듭하며 고(苦)의 뫼비우스 띠 속에 스스로를 가둡니다. 먼지가 쌓여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거짓된 것이 진실로 보여 쫓아 달려갑니다. 그러나 찰나 만에 길을 잃고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오답을 붙들고 ‘이것이 맞다’며 아집으로 억지를 부립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자비로운 부처님께선 무명에 가려진 인간이 부처님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진실된 각자의 본래 자성을 깨치기를 바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일체중생도 본래 존귀한 불성을 갖추고 있어 부처님과 차별이 없으니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분의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법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법문을 통해 우리는 자성을 깨져가는 것임에 부처님을 공경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자성을 갖춘 나를 믿고 깊은 통찰과 이해로 언제 어디서나 지혜를 발휘하여야 자신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오롯이 볼 수 있게 될 때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고의 윤회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성을 맑고 깨끗이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자신의 습성과 기질을 바꾸는 것이 수행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쌓여있는 자성의 먼지를 계속하여 털어내는 일입니다. 털고 닦고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꾸준히 묵묵히 해나감이 수행인 것입니다. 여기에 부처님께서 주신 6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육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입니다.


마음속의 자리 잡은 인색함과 탐욕을 미련 없이 버리는 보시. 보시는 금전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말과 도움을 주는 것도 모두 보시입니다. 타인에게 환희심을 줄 수 있는 보시행은 베푸는 나에게 더 큰 환희심을 가져다줍니다.


지계를 지킴은 타인을 침해하지 않음입니다.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지 않고,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타인의 신체를 침해하지 않고, 타인의 신용을 침해하지 않으며, 타인의 안전을 침해하지 않음으로 도덕적 수양이 쌓입니다.


넓은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인욕. “한순간만 참으면 몰아치던 비바람도 멎고 파도도 잔잔해지며, 한걸음 물러나 생각하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시야가 넓어져야 내 마음도 넓어집니다.

일체의 선행을 독려할 수 있는 정진. 아직 범하지 않은 악행은 생겨나지 않게 하고 이미 저지른 악행은 참회하고, 아직 하지 않은 선행은 싹을 틔워야 하며 이미 행한 선행은 보호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의지를 집중시키는 선정. 선정의 수양으로 환경에 휘둘려 기복을 나타내고 동요하는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의 힘입니다.


이렇게 육바라밀은 적극적 수행이며 의미가 매우 깊습니다. 결국에는 우리를 원만한 궁극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수행입니다. 육바라밀 수행과 염송정진으로 본래 청정한 자성이 빛을 발하면 ‘나’는 지혜로워집니다. 미혹을 깨치며, 대범해지며, 삿됨은 올바름으로 망상을 진실로 바꾼 명료해진 ‘나’의 앞엔 희망찬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성도합시다.


마음이 흩어지면 귀신이 되고 마음이 모아지면 정신이 된다.

귀신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그의 근본이 나에게 있으니, 다른 곳에 빌지 말고 자성불에 참회하고 서원하여 보라.

그 복이 백천만 배가 되어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종조법설집」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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