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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7-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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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칼럼리스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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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7-08 13:35 조회 2,5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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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권마다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 다양 ‘화광동진’ 세계로 나가려는 원력의 소산이어야

6월 22일은 하지(夏至)로 일년 중 양(陽)인 낮이 가장 긴 날로 다음날부터 일음시생(一陰始生)한다고 합니다. 12월 22일경에 이르면 이번에는 반대로 음(陰)인 밤이 가장 긴 날로 다음날부터 일양시생(一陽始生)하여 고대사회에서는 일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지와 동지는 하늘의 변화에 해당되고 땅의 변화는 이보다 한 달 정도 뒤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지는 낮이 가장 길지만 가장 더운 시기는 대략 한 달 뒤인 7월 23일경의 대서(大暑)이고 동지는 밤이 가장 길지만 는 가장 추운 시기는 한 달 뒤인 대한(大寒)이 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대동란(大動亂)의 시기였습니다. 춘추전국 시대는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구성원리가 요구되는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낡은 제도와 사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제도와 사상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과도기가 바로 혼란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저마다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제자백가(諸子百家), 백화제방(百花齊放)으로 표현합니다. 그러한 흐름의 하나로 음양가와 오행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두 사상은 일종의 자연과학으로 당시의 수준에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나름의 논리적인 설명을 전개하였습니다. 어느 시대의 종교와 사상이든지 우주와 자연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이론을 배경으로 두르고 자신의 주장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음양가와 오행가는 대략 한나라 때에 음양오행으로 통합되고 동중서에 의해 유교의 우주론으로 채택됩니다. 

그리고 동중서의 천인상관론(天人相關論)과 재이(災異)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래 음양과 오행은 도가(道家)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유교도 같은 이론을 수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음양오행론이 유교의 우주론이자 자연관의 원리로 수용된 사례를 조선 중기의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양오행론이 민간 신앙에도 영향을 주어 성립한 것이 바로 사주(四住) 명리(命理)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운명의 전개 과정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커서 각 문명권마다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아마도 사주 명리가 가장 논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신살(神煞)같이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많이 있지만 사주 명리의 근거인 음양오행론은 당시의 수준이 도달한 과학이론이었기에 나름 논리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천간(天干)은 하늘의 기운에 해당하고 지지(地支)는 천간의 기운이 땅에서 펼쳐진 것에 해당합니다. 천과 인이 이렇게 서로 관계(천인상관, 天人相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늘과 인간이 연결되는 또 다른 방법은 기도입니다. 따라서 사주를 보는 행위는 일종의 종교적 행위로 다른 종교의 신앙행위와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사회는 당연히 과학이 발달하여 이전에는 설명되지 않던 수많은 현상들이 해명(解明)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주 명리에서 설명하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 애정운, 금전운, 자녀운, 출세운 등으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아마도 바뀌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주팔자의 운명은 정해진 것으로 이를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단지 미리 알아서 대비한다면 흉한 경우는 그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더 좋은 것은 수행을 통해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생로병사라는 과정을 거치는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수행을 통해 고(苦)를 고(苦)로 받아들이고 낙(樂)을 낙으로 받아들인다면 고와 낙이 있되 작용하지 않는 상태인 무화(無化)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요? 

사주 명리를 알아보는 것은 이기적 욕망의 충족보다는 아마도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운명과 함께 살아가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세계로 나가려는 원력(願力)의 소산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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