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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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6-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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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6-04 13:22 조회 2,634회본문
지혜의 힘이 커지면 지혜로써 행동하게 돼 “미래의 완성된 수행 위해 지금 힘들지 말것 ”
붓다가 가르쳐주신 길-8정도
붓다는 당신의 제자들이 걸어 가야할 길을 그 사람의 성향에 맞추어서 아주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한 방법을 대표해서 말할 때는 항상 8정도를 이야기합니다. 8정도는 8가지 바른 길,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의 고요함입니다. 8가지 길을 돌아서 새롭게 도착하는 곳은 다시 바른 견해입니다. 처음의 바른 견해와 마지막의 바른 견해가 말로 표현하면 같은 말로 표현되겠지만 지혜의 깊이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지난 연재 ‘바른 견해’에 이어갑니다.
바른 사유
수행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옳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바른 사유라고 합니다. 수행은 우선 많이 듣고 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가 생겨나면 내 마음은 스스로 이것들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생각합니다. 수행을 해 가면서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수행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두 바른 사유에 들어갑니다. 알아차림을 해가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실재의 이해들이 조금씩 생겨나게 됩니다. 조금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생기게 되고 자신이 깊이 알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생각이 무엇인지, 실재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조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은 생각을 통해서 분명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내 마음 안에 알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이런 힘은 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수행하는 가운데 작용하고 수행하는 마음의 조건이 아주 좋았을 때 분명한 통찰의 지혜로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알아차림을 바르게 해 가게 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빨라지고 힘이 있어집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따라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마음이 따라 오게 됩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아차림 하면 마음의 자연스런 진행으로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지혜가 삼빠쟈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배식 받고 있습니다. 준비된 반찬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습니다. 한 스푼 떠서 담았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에서 한 스푼 더 뜨고 싶은 마음의 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어나는 마음의 힘을 바르게 알아차림 했습니다. 그러면 바로 뒤 이어서 그렇게 더 뜨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바로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마음의 느낌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리고는 좀 더 입체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 뒤에 몇 명이 남았고 반찬이 얼마 남았으니까 얼마를 뜨는 것이 적당한지를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마음들은 지혜의 마음입니다. 지혜의 마음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적당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항상 옳다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옳다고 아는 마음도 있지만 더 먹고 싶은 욕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의 힘이 더 커서 더 떠서 담았다고 해 봅시다. 내 스스로 그릇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잘못 쓰게 되면 마음이 스스로 그릇되었다는 것을 좋지 않은 마음의 느낌으로 보여줍니다. 그릇을 들고 자리게 들어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업의 과보를 바로 받은 것입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내 뒤에 남은 사람이 그 반찬을 먹는지 가끔 확인하게 됩니다.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괴롭습니다.
알아차림이 계속 있게 되면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처음에는 욕심의 힘이 강해서 욕심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만 조금씩 지혜의 힘이 커지면서 지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욕심의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마음이 옳다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되고 마음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있고 지혜의 힘이 좋아지게 되면 무엇을 할 때 옳은지 그른지,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를 판단하고 하게 됩니다. 말을 할 때 자연스럽게 옳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옳은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아갈 때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힘이 좋아지면 지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혜의 옳음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노력
바른 노력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에는 욕심의 마음이 함께하기 쉽습니다. 수행에서 필요한 노력은 꾸준하게 해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순간 바른 견해를 일으켜주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 순간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하셔야합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있는 시간과 장소는 여기 이 순간뿐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도 여기 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수행의 완성도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미래의 완성된 수행을 바라면서 지금 힘들게 수행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바르게 하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른 견해가 있고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른 알아차림
바른 알아차림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기 위해서 우리는 알아차림을 하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일으켜줍니다.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림 하기 위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따로 따로 알아갑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이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한다고 하더라도 실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실재하는 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할 때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해석한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 때 보이는 대상, 들리는 소리, 느껴지는 느낌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들은 이미 마음에 인식된 것이고 관념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보라고 합니다. 자유롭게 대상을 옮겨 다니면서 알라고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하게 되면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많이 물러나게 되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중에는 내가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이 저절로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할 수 있을 때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합니다.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이 안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 어느 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화되지 않는 순수한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린 이렇게 관념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성질로써 존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 빠라마타, 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수행에서 아는 마음을 이해했을 때 진정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진짜 위빠사나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마음의 고요함
집중명상을 통해서도 마음의 고요함이 생기고 지혜명상을 통해서도 마음의 고요함이 생깁니다. 지혜명상에서는 견해가 바르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대상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것을 까니카 사마디라고 말합니다. 이 사마디는 여러 대상을 자유롭게 알고 깨어있고 활기차지만 고요합니다. 마음의 활발함과 마음의 고요함이 균형을 이룬 그런 고요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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