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길을 두고 굽은 길로 돌아가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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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0-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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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0-05 11:56 조회 2,544회본문
곧은 길을 두고 굽은 길로 돌아가지 못하다
1864년 승정원 일기, 대성사 조부 손규헌 선전관 임명 ... 대성사의 영명함과 고귀함, 조부 성품 가장 많이 닮아
제 1장 시절인연
탄생_②
고려가 망한 후 일직 손 씨들은 대부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거나 자중하여 새 왕조에 복종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고 한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은 것을 보면 곧은 길을 두고 굽은 길로 돌아가지 못한 대성사의 인품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강직한 성품들이 드러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8세손 손조서(孫肇瑞)는 세종 때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친 후 벼슬길에 나섰으나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이에 항의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왜적에게 유린되자 손처눌(孫處訥)은 의병장으로 나서 팔공산에서 왜적과 싸워 이기고 대구를 지켜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직 손 씨들은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으로 봉직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의 양반 제도는 문반과 무반으로 이루어졌으며 손 씨 가문은 독특하게도 문과에 6명의 급제자를 냈고, 무과에도 6명의 급제자를 냈다. 문무에 출중한 가문을 이룬 것이다.
특히 숙종대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삼품 첨지중추부사에 오른 손필억(孫必億)을 필두로 대성사의 조부인 정삼품 당상관 통정대부 신광첨사 겸 병마첨절제사(通政大夫 神光僉事 兼 兵馬僉節制使) 손규헌에 이르기까지 7대를 거쳐 9명의 병사(兵使)를 낳았다. 조선의 명망 높은 무반 집안으로 꼽히고 있다.
손 씨들의 위세는 대성사의 고향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은 다죽리 죽서마을에 은거하던 일직 손 씨 다섯 선비를 지칭한 손씨 5현(五賢)을 받드는 서원이다. 다죽리 손 씨 일가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고, 또한 문약함에 빠지지 않아 지혜와 무예를 함께 수련한 가문의 전통으로 후손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고종 시절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서원의 간판을 내리고 철운재(徹雲齋) 현판을 걸었다.
죽서마을에 자리하였다 하여 서산고택(西山古宅)이란 편액도 달았다. 밀양에는 모두 11곳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혜산서원은 손 씨 가문의 번창과 더불어 크게 번성했다.
대성사의 조부는 오늘의 장관 직급에 해당하는 정삼품 벼슬에 올라 당상관으로 출세한 손규헌(孫珪憲, 1842~1899)이다. 조선시대 벼슬길에 오르는 길은 과거뿐 아니라 음서제도(陰敍制度)가 있었고 그에 의해 관직을 얻은 이들을 음관(陰官)이라 불렀다.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공과에 의해 추천을 받아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가 음서제다. 소위 뼈대 있고 혈통 좋고 국가에 공적을 세운 관료의 자손 중에서 음관으로 추천 받을 수 있으니 15명의 음관을 배출한 일직 손 씨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대성사의 성품은 조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전한다.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성격은 할아버지의 것을 빼닮았다고 한다.
대성사의 조부는 20세 초반에 훈련원에서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고, 공직 기간 중 빠른 출세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의 지시사항과 행정 사무 처리를 기록한 승정원일기 1864년의 기사에 대성사의 조부를 선전관으로 임명했다는 기사가 기록돼있다. 무관에 등과한 지 2년 만의 일이니 승진도 무척 빠른 편이다.
선전관은 왕을 지척에서 지키는 역할을 하여 주요직으로 간주 됐다. 또 무반 중에서 후일 핵심적인 역할을 할 인재들로 임명했고, 무술의 재능이 뛰어나고 용기가 담대한 이들을 주로 뽑는 자리였다.
선전관은 평소 업무뿐 아니라 무예와 병법 훈련을 끊이지 않아 승진에도 특전을 주는 직위인데, 고종이 왕위에 오른 해 훈련원 선전관으로 임명된 것은 무예의 자질이나 성품을 인정받은 것이다.
손규헌은 1870년에는 웅천 현감으로 나가게 된다.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 창원 지역 일대이고 예나 지금이나 남해안의 군사전략 상 요충지로 꼽힌다. 고향인 밀양과도 그다지 멀지 않아 상당한 배려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과 중앙 관서 간에 오고 간 공문서는 「각사등록(各司謄錄)」이란 문헌에 남아있다. 그 안에 경상도 지역 삼도통제사 신정이 지방 관서장의 인사평가를 왕에게 보고한 내용이 남아있는데, 그 보고서인 1870년의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에 웅천 현감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웅천 현감 손규헌은 그 영명함이 간특한 계략을 살피는 데서 드러났고 그 고귀함은 사전에 대비하는 데서 고귀해졌다. 상(熊川縣監 孫珪憲, 明著察奸, 勤貴備虞, 上)”
현감의 성품과 근무 태도를 영명함과 고귀함으로 표현하였으니, 문장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찬이다. 아마도 현감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송사의 잘잘못을 잘 가려내고 군사로써 방비를 잘 갖추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성사가 조부를 고스란히 닮았다는 이야기는 이 같은 평가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영명함과 고귀함, 후일 교단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데 그 성품이 빛을 발한 것은 명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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