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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전쟁을 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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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9-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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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칼럼리스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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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9-02 14:12 조회 2,4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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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전쟁을 보는 시각
불교의 전래와 러일전쟁,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연결 ... 극단적 이슬람 세력과 극단적 기독교 복음주의의 충돌

아프가니스탄은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다. 그 하나가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러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친 근대 이후 서구열강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식민지를 더 많이 갖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을 펼쳤다. 영국과 프랑스가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침략하였다면, 러시아는 동쪽의 미개척지인 시베리아 쪽으로 침략하였다. 영토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에서 서쪽 끝인 스칸디나반도에 걸쳐있는 형태로 팽창한 러시아는 동서 간의 교통망을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를 부설하였고 바다를 통해 동서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문제는 바다를 통한 교통 통신망인데 이러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한 나라가 바로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海外)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해군이 발전하였다면, 상대적으로 러시아는 육군국이었다. 그러나 대량의 물자수송은 선박이 효율적이었기에 러시아는 동서로 늘어진 영토를 연결하기 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동아시아 지역까지 펼쳐진 영토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남진 정책을 펼쳤다. 러시아의 해상교통로는 서쪽의 발트해 연안과 흑해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통로,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한 통로가 있었다. 러시아는 발트해 연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고,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크림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은 오스만투르크를 지원하여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저지하였다.

러시아가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야 했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러시아가 지중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진출하거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인도양으로 진출할 경우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러시아의 압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영국은 크림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함대의 활동을 아직 견제하지는 못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는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한반도 남단에는 천혜의 항구가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함대의 항로는 대한해협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이 커지면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의 태평양 진출이 용이할 것을 염려한 영국은 1885년 불법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1897년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는 저탄소(당시 선박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였기에 적절한 지점에 석탄을 저장하는 시설을 두었다) 설치를 위한 절영도 조차(租借)를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영국은 전 세계에 산재한 식민지 관리 때문에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영국은 이제 근대화에 막 들어선 일본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동아시아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정책을 선택하였다. 일본은 영국의 지원 아래 열강의 중국 침략에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랴오뚱 반도를 할양받았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다시 청에 반환하였다. 결국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에 전쟁비용에 충당하도록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였고 일본이 승기를 잡으면서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이전에 영국과는 2차 영일동맹을, 미국과는 카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받았다.

이렇듯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러일전쟁의 배경으로 작용하였고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언어가 같고 문화적 공통점이 많아서 국제사회에서 두 나라는 대외정책에서 보조를 맞추어왔다. 

9.11 테러에서 비롯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내심 미국이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 의도와 맞물려있다. 이제 영국이 이 지역에서의 역할을 미국이 맡은 꼴인데 아프간에서 친미 정권을 세워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비록 한국이 최근에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선진국 중 유일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에 서방세계와는 다른 시야를 함께 가질 필요가 있다. 아프간 전쟁은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인 탈레반과 극단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인 미국이 충돌한 전쟁이라는 관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두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종교 아닌가?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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