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소식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경전에 길이 있다

페이지 정보

호수 26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9-01 신문면수 2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내 눈높이로 읽는 소의경전<2>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승원 정사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9-02 14:08 조회 2,664회

본문

연재글: 대일경_주심품 (2회)

경전에 길이 있다

법문의 이해를 돕는 사전지식

지난 호에 법문의 이해를 돕는 사전 지식 1) 마음: 알아지는 작용, 알아지는 현상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2) 마음(앎의 작용)은 찰나적 존재이며

    항상 대상과 함께 일어난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생겨나는 앎인 마음들은 찰나적의 존재이며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대상과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떠한 것이다라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것을 알 때는 실재 있는 것을 마음이 해석하여 알아집니다. 우리 앞에 꽃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무언가는 분명 실재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보고 순식간에 무엇이 있다고 느끼고(수:受) 그것이 꽃이구나 라고 해석(상:想)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무덤덤하게 반응(행:行)합니다. 이런 앎의 진행이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렇게 앎의 실상은 찰나적으로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연속적인 앎의 과정에  ‘나’라는 실재는 없습니다. 


3) 나와 세계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이름이 무엇이고, 누구의 자식이고, 하는 일은 무엇이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존재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끊임없이 알고 느끼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현상이 ‘나’라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즉, 깨닫지 못한 사람이 아는 ‘나’라는 것은 마음이 해석한 관념이고, 실상은 육문(六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서 끊임없이 알아지고 느끼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앎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오온(색수상행식)을 ‘나’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마음이 이해하고 해석한 관념이며 실재는 육문(감각기관)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우리의 마음이 만든(해석한) 관념이고 실재는 육문(六門)에서 끊임없이 알아지고 느끼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앎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즉 실상의 차원에서는 나와 너, 세계가 둘이 아닙니다.


4) 관념과 실재_

    실재를 아는 지혜 반야(통찰지)

육문(六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앎의 현상이 나와 세계의 본질이며 이러한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반야(통찰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앎에서 실재 있는 것을 법(法, 빠라마타)이라 하고 우리 마음이 해석한 것을 관념(빤야띠)라 합니다. 

우리가 겪는 아무리 괴롭고 복잡한 문제도 실상은 순간순간 생겨나는 앎일 뿐이고 이 실상을 아는 지혜(반야般若)가 없으면 마음이 해석한 관념에 따라 마음이 탐진치 삼독심이 됩니다. 특히 우리에게 큰 괴로움이라고 여겨지는 생로병사와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등은 이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우리를 모든 괴로움에서 건져내 주는 동아줄입니다. 그럼 어떻게 반야를 얻을 수 있을까요?


5) 반야를 깨치는 수행_

    통찰수행 (위빠사나; 삼밀관행)

먼저 수행은 ‘마음을 좋게 하는 일’ 즉 탐진치 삼독심의 안좋은 마음을 탐진치 없는 좋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에는 두 가지 있습니다.


① 집중명상(지止, 사마타)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한 수행

사마타는 존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내게 알아지는 특정한 하나의 앎(관념)을 대상으로 마음을 힘껏 밀어붙입니다. 마음이 그 관념의 대상에서 떠나면 다시 그 대상에 집중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마음은 힘이 생기고 알아지는 대상이 점차로 줄어들어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집중명상은 시끄럽거나 주의가 흩어지는 환경에서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조용한 곳, 알아지는 대상이 적은 곳을 선호합니다. 집중명상으로 삼독심이 삼독심 없는 고요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해(반야)는 사마타 수행으로는 알 수가 없고 그 관념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마음이 금방 동요합니다.


②지혜명상(관觀, 위빠사나)

지혜명상은 나의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앎에서 실제로 있는 것, 즉 실재인 법(法)에 주시합니다. 하나의 특정한 대상이 아니고 알 수 있는 모든 대상을 편안하게 알아차립니다. 앎의 과정은 너무나 빠르고 복잡해 부처님이 아니고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알 수 있는, 내게 알아지는 것만 편안하게 알아가십시오. 

육문을 통해 알아지는 앎들. 형상을 단지 형상으로, 소리를 단지 소리로, 냄새를 단지 냄새로. 몸에서 알아지는 감촉을 몸의 느낌으로, 그것을 알고, 느끼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마음에서의 작용도 알아가십시오. 이렇게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가다 보면 알아지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알되 덜 동요하여 점차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고요함을 찰나찰나 생겨나는 앎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자유롭다하여 찰나삼매라 합니다. 

집중명상의 결과로 얻어지는 몰입삼매나 근접삼매와는 성질이 다릅니다. 찰나찰나 앎은 일어나지만 마음은 알고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서의 알아지는 실재를 알아차리다 보면 실재하는 법의 보편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견해로 앎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혜명상은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내가 아닌 무아적 존재라는 견해로 수행하기 때문에 다만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앎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 지혜명상의 목적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