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廻光返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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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0-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0:41 조회 142회본문
생명의 빛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삶
진공(眞空)이라야 묘유(妙有) 가능
개인적으로 종용록(從容錄)은 아주 오래전 불광이라는 잡지에 연재되던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불광은 70년대 말 고등학교 2학년 말쯤에 서점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매달 서점에 가서 사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그 잡지 안에 실린 내용을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종용록이라는 책 제목을 아주 가끔 만났다가 한 선문답이 인상적이라 여기저기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곽 시자가 덕산에게 물었다. “예부터 모든 성인들께서는 어느 곳으로 가셨습니까? 덕산이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 곽 시자가 말했다. “비룡같은 말을 점찍었는데 절름발이 자라가 나오는군!” 덕산은 곧 그만두었다. 다음날 덕산이 목욕하고 나오는데 곽 시자가 차를 건넸다. 덕산이 곽 시자의 등을 한 번 어루만지자 곽 시자가 말했다. “이 늙은이가 이제 겨우 반짝하는구나!” 덕산은 다시 그만두었다.
곽 시자는 수행승으로 덕산 선감 스님의 시봉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곽 시자의 질문에 덕산이 잘 안 들린다는 듯이 되묻습니다. 선문답에서는 아주 미세한 행동까지도 어떤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곽 시자는 비룡과 자라를 대비해서 자신의 선문답에 엉뚱한 답을 하는 덕산 스님을 조금은 조롱하는 듯한 말을 하는군요. 저의 생각으로 덕산 스님의 대답은 곽 시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곽 시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듯합니다. 곽 시자는 이미 자신의 답을 가지고 물었기에 덕산 스님의 대답을 비판한 것은 아닌지요.
이어지는 문답에서도 곽 시자는 덕산 스님의 행동을 역시 조롱하듯이 비판합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덕산 스님이 곽시자가 가지고 있는 판단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되물어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물과 사건에 대해 시비선악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일종의 이정표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저도 많이 헤매었는데, 만약 따라야 할 기준이 없다면 오히려 사회에 혼란이 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에 이끌리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준이 분명할수록 타인에게는 칼날처럼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집단 내지 민족이나 국가단위로 옮겨가면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이 거세게 공격을 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이나 레바논의 헤즈볼라의 사이가 좋은 사례입니다. 팔레스타인인(人)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유대인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의해 구분될 뿐입니다. 단지 종교적인 이유로 공존하지 못하고 상잔(相殘)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선문답에서 덕산 스님은 곽 시자의 면박에도 침묵으로만 일관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아니라고 여긴 것은 아닌지요. 이 내용이 책에 실린 것은 아마도 곽 시자가 훗날 덕산 스님의 의도를 알아차려 두 사람의 문답을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요? 첫 문답이 있고 난 다음날 덕산 스님은 등을 쓰따듬었다가 다시 면박을 당합니다. 아마도 이때의 인연으로 곽 시자는 깨달음을 얻고 회고한 것은 아닌지요. 덕산 스님은 임제 스님과 동시대에 활동하여 임제할(臨濟喝) 덕산방(德山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선문답을 읽으면서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떠올립니다. 불교에서는 진공이 과학용어로 사용되면서 불교용어로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매우 핵심적인 용어입니다. 자기 주장이 없다는 것은 줏대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공이라야 묘유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마구 휘둘리는 것도 아니고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것에 맹종하는 것도 아닌, 뭇 생명이 자신의 개성을 가득 피우도록 돕는 길입니다. 그 생명의 빛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삶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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