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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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0-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법문 서브카테고리 이달의 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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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0-05 11:53 조회 2,658회본문
불교의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 ‘이고득락(離苦得樂)’
가치관이 뚜렷해야 바른 방향으로 우리 삶을 결정
행복과 해탈은 무아인 나, 일물(一物)이 창조하는 것
누구나 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에 대한 태도결정을 인생관이라고 한다.
인생관은 인간 각자의 주체적인 것이므로 인간 개개인에 따라 형형색색이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생관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그 인생관이 무자각 무반성한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우의 일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비교적 무가치한 평범 내지는 저속한 것에 속한다.
인생관이 평범하고 저속한 것일 때 그러한 인생관에 입각하여 영위되는 인생이
무의의(無意義)한 것으로 끝맺게 됨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므로 사려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무가치한 자연적 인생관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인생관을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구하려고 한다.
철학과 종교에서는 모든 인생에 대한 문제들이 관능적 자연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지적으로
해석되고 평가되므로 철학적 종교적 인생관은 가치실현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도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생관 형성의 법칙으로서는 첫째 현실 파악, 둘째 생의 평가,
셋째 목적설정의 삼단계의 구조를 말한다.
즉 인간의 존재란 어떠한 것인가, 다음에 인간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끝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인생의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것인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인생의 실존성의 문제요, 둘째는 가치성의 문제며, 셋째는 목적성의 문제인 것이다.
<종조법설집, 99쪽>
불교의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고(苦)를 떠나 락(樂)을 얻는 것, 즉 고통을 떠나 행복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행복은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모든 문화 문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까닭은 불교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대로 살아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여기겠지만 사람은 종종 그 상식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 모두의 이고득락을 위하여, 행복 해탈을 위하여, 그 가르침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따르며 살고 있는지, 이 마음은 지금 얼마나 평화로운지, 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합니다.
불교는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도구이며 행복을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경전 말씀은 진리로 받들며 외우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잠시 사유하는 시간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로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우리들의 삶이라 봅니다.
그런데 이 삶을 결정하는 요인,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요?
각자의 신념, 태도, 가치관입니다.
삶의 목적을 결정하는 목적이 되는 가치관이 뚜렷해야 우리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행복이 아닐까요. 행복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 모두의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겠지요.
그럼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우리의 가슴에 일어나는 긍정적인 정서, 좋은 느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였더니 탐진치(貪瞋痴)가 사라져서 우리 가슴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졌다면 그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 그것이 행복입니다.
좀 깊게 사유해 본다면 불교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감, 해탈감이라 할 것입니다.
우주에 있는 유형무형 유정무정 모든 존재들의 상생의 행복 해탈에 깊게 머물러 사유해 봅니다.
존재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 변화에 따라 가슴 속 정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해 봅니다.
‘나’라는 실체(實體)를 들고 있을 때와 그 ‘나’가 비실체적인 ‘무아(無我)’임을 이해하였을 때 내 가슴 속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를 섬세하게 느껴봅니다.
우리의 행, 불행의 알맹이인 이 느낌에 눈뜨고 이 느낌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무궁한 것인가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관점의 전환으로 해탈의 느낌이 경험되는 것이며, 그리고 습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와 무아관의 정견정립으로, 관점전환하여 바라볼 때의 느낌의 차이를 알아차려 봅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면 싯다르타 태자가 가지고 있던 강렬한 문제의식을 나의 것으로 느껴보고, 그의 간절한 원(願)을 나의 원으로 느껴보고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어떤 궁극의 것을 지향해 가야 할 것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부귀영화를 포기하며 얻고자 하였던 것에 다시금 깊게 머물러 봅니다. 고(苦)를 떠나 멸(滅)에 이른다. 그 고(苦)를 생각해 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이지요.
태어나고 죽는 인생 자체가 고통인 데다 그 고통 중에 애착하고, 미워하는 고통이 덧쌓이고, 애타게 갈구하나 끝내 손에 넣지 못하는 숙명 같은 욕구불만으로 그 고통들이 얽히고설켜 일파만파로 가지각색의 고통을 확대재생산 하는 무한 고통의 늪에서 습관적인 관점으로, 무반성적으로 살아가면 필히 억만의 고통으로 범벅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한 이치이니 습관적인 관점으로부터 기필코 벗어나겠다는 원을 더욱 간절히 세워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고 어떻게 해탈할 것인가?
가까운 내 마음에 극락을 찾자.
물건을 먼 곳에 두고 찾으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가 먼 곳에 있다고, 또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성불하기 어렵게 여겨지지마는, 자성불이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성불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진리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 즉, 깨치기가 어렵지마는, 만약 생활 중에 있다고 안다면, 곧 능히 체득하여 깨칠 것이다. 극락이 서방 십만억 국토의 밖에 있다고 여긴다면, 죽은 후에나 왕생할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름지기 자기 마음 가운데 극락이 있음을 알지니라. 현세가 극락인 즉 이것이 곧 가없는 고해에서 머리를 돌려 저 언덕을 바라보라고 한 비유인 것이다.
<종조법설집, 185쪽>
연기무아해탈.
연기동체대비의 기운이 충만된 무한 존재계가 드러난 그런 관점, 부처님께서는 연기라는 관점을 발견하시고 그대들도 이 지점에 와서 자신과 존재계를 바라보고 그 이치대로 살아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존재계는 관점하나 바꾸면 그대로 무한히 열려있는 안팎으로 걸릴 것이 없는 고(苦)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극락정토입니다.
법신불의 존재
법신불의 존재는 우주대기의 주인공이니 즉, 어떠한 특정 신의 의지로서 목적을 향해 천지를 생성시키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만 기계적으로 물리적 법칙 아래서 작용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가운데 무엇인가 우주만유를 생성 화육하고 상호 조화하도록 하는 작용 즉, 무엇인가 크게 하고 있으면서 한다고 고정된 주체도 없고 흔적도 없으며 또한 하지 않는 것도 아닌 무한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종조법설집, 242쪽>
이 세상은 연기 상생이라는 존재계 작동 이치의 질서대로 무위법의 흐름임을 인식함으로 편안한 평화로움을 느껴봅니다.
일체유심조(一體有心造)
천하를 행복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행복은 자기 마음 가운데 있더라는 말, 불교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종조법설집, 220쪽>
외형은 내성을 닮아 난다. 즉 육체는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일체는 유심조다. 화복도 그 마음에 달렸다.
<종조법설집, 239쪽>
원효대사의 해골통 이야기를 떠올려 보더라도 현실이란 나의 마음의 필터를 통해서 나타나는 색성향미촉법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금강경』
한 생각에 지옥이요, 한 생각에 극락입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무아이며 무상이므로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공(空)의 관점으로 연기적 상생의 이치로 한 생각 전환하여 나와 세상을 바라볼 때 마음의 평화와 해탈을 경험해 가게 됩니다.
밀교의 구경성불
인간은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고 극락도 인간이 다 건설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종조법설집, 240쪽>
그러므로 행복도 해탈도 무아인 내가, 이 일물(一物, 우리의 주인공인 마음)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인생관’에 깊이 머물러 음미해 보면서 인생의 목적을 기준으로 닦아가는 삶이 궁극의 길임을 거듭 자각하면서 우리 모두의 행복 해탈을 서원합니다.
성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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