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강을 건너니 살길이 열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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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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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2-11 13:42 조회 2,102회본문
언 강을 건너니 살길이 열린 것 같았다
나라를 되찾자는 결기로 밀양에서 봉천까지 2천리
대성사 나이 6세, 어린나이에도 의연하게 망명길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한 치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경험은 후일 새로운 시대의 교법을 열 때도 힘이 되었다.”
1912년 나라가 완전히 일본의 손에 넘어가자 부친 손기현은 큰 결심을 한다. 조용히 재산과 세간살이를 처분하고 망명의 길에 나선 것이다. 목적지는 만주 땅 서간도. 당시 독립전쟁을 펼치려는 이들이 거점으로 삼은 땅이다. 망명을 위한 준비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가재도구는 모두 나누거나 내다팔았다. 급히 내다 파니 제값을 받을 도리가 없었지만 빨리 처분하기 위해 헐값에라도 옥토며 세간살이들을 넘겼다. 빼앗긴 조국이니 노비문서를 불살라 신분을 풀어주던 일도 망명객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다. 담살이하던 식솔들에게 가산을 나눠주고,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명을 보존하고 후일을 도모하여 밝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언약을 남겼다.
대부분의 망명객은 짐을 줄이고 줄여 이불이며 솥을 제외하고는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처분하는 것이 상례였다. 망명길에서 먹을 양식과 만주에서 첫해를 넘길 곡식, 그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심을 종자가 목숨을 지켜줄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 밖의 것들은 이 산하를 되찾은 후에야 의미 있는 것일 뿐 조국이 왜인에게 빼앗겼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나라를 빼앗긴 절망과 조국을 되찾겠다는 희망 앞에서 희망의 편에 서기로 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의지요 신념이었다.
망명은 대개 사전에 뜻을 모은 여러 사람과 가족이 동행하여 떠났는데,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100여 명까지 무리를 이루었다. 긴 여정에 혹시 모를 사고를 막고 낯선 땅에서 함께 정착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은 만주에 미리 정착한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길과 목적지를 정한 후 움직였다고 한다.
안창호, 이희영, 이동영 등이 주축이 된 신민회新民會는 1910년부터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대규모 이주와 망명을 계획하여 진행했다. 주로 건너간 곳은 서간도 땅, 봉천과 인근인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 지역, 고구려의 옛 영토이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봉천은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로, 당시는 청나라 동변도에 속하는 지역으로 만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하고 군사기지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이 망명객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다. 은밀히 동지를 모으고 망명을 도와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 손기현도 그 뜻에 동참했다.
밀양에서 봉천까지 직선거리로 830킬로미터가 넘으니 거리상으로는 2,000리 이상, 산 넘고 강 건너 구비구비 걸어야하는 육로로는 3,000리에서 4,000리 정도가 되는 머나먼 거리이다. 젊은 장정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하여도 여러 달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게다가 길에서 만날지도 모를 도적떼와 일본 헌병과 경찰의 눈도 피했어야 하니 시간은 더욱 길어지고 길은 멀 수밖에 없었다. 대성사 가족이 길을 떠난 것은 1912년 가을 무렵. 대성사의 나이 6살, 형은 10살 때의 일이다.
원수의 땅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느니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다면 나라를 되찾아 자식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는 결기를 세운 것이다. 부모는 어린 두 형제를 앞세우고 소달구지에, 고국의 삶과 영예를 다 정리하고 남은 하나, 미래의 희망을 싣고 동지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당시의 일을 경험한 이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지만 가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대성사는 어린 나이에도 의연하게 망명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가는 길에 끼니를 때우기 위해 얻은 주먹밥 한 덩이를 형에게 양보하기도 하고, 6살 어린이인데도 칭얼댐 없이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의 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당당히 걸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한 발 한발 내딛는 걸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 한 치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경험은 후일 새로운 시대의 교법을 열 때도 힘이 되었다.
망명길을 대부분 가을에 떠나는 것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어 한 푼이라도 노자에 보탤 뿐 아니라 양식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압록강이 얼어야 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먼저 정착한 동지들의 도움으로 정착할 곳을 잡고, 운 좋게 겨울을 나면 다음 해 봄 곧바로 땅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 또 한 해를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셈법으로 가을에 길을 떠났으나 ‘길 떠나면 고생’이라는 속담처럼 날은 점점 추워지고, 따듯한 고장 밀양보다 북쪽의 가을과 겨울은 혹독하다 못해 생명을 위협하는 고통으로 다가섰다. 세월의 비장함 앞에 대성사는 어린 나이에도 자기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동로는 험난했다. 밀양에서 청도-대구-안동-영주를 거쳐 소백산을 넘고 원주에서 춘천으로 가서 철원에 이르게 된다. 철원에서 신계-곡산-평양을 지나 개천과 영변을 지나치면 개마고원이 험하게 펼쳐졌다. 산과 산을 넘고 넘어 전천에서 다시 압록강을 향해 가면 드디어 국경인 초산에 닿는다.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데, 대개는 겨울철 강이 얼었을 때 국경 경비대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월경을 했다. 대성사는 생전에 강을 건너던 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남겼다고 전한다.
“강이 꽁꽁 얼었는데 달빛이 환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의지가 됐지만 일본군의 눈에 띌까 두려움도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신발에 다시 짚으로 꼰 끈을 묶어 채비를 마쳤다. 모두 준비가 됐을 때 주변을 살펴서 숨죽이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모두 입 다물고 앞만 보고 걸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발걸음을 조심조심 내디뎠다. 간혹 쩌렁쩌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혹시라도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숨 죽여서 도착한 곳이 만주 땅이다. 언 강을 건너니 살길이 열린 것 같았다.”
초산을 지나면 바로 압록강이 나오는데 망명객들은 강변야산에 몸을 감추고 밤을 기다렸다고 한다. 몸을 녹일 모닥불조차 피울 수 없이 온몸으로 삭풍을 맞으며 때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 길잡이와 함께 국경을 건너 고국과는 작별을 고했다.
이 무렵 대성사 일행과 함께 혹은 앞서거니 뒤따르며 강을 건넜던 밀양 출신 지사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투사들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대종교 3대 교주이자 민족학교인 동창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이끌던 단애 윤세복, 단애의 형인 백암 윤세용, 김원봉의 동지이자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윤세주, 독립운동가인 백농 이용식, 의열단 고문 황상규, 의열단원인 김산윤, 한봉근, 한봉인 등이 망명에 나서서 서간도에 터를 잡은 밀양 출신이다.
그러니 척박한 이국땅에서도 마음 붙이고 뿌리내려 독립을 위해 싸우기에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먼 길을 떠나 목적지에 닿은 것은 1913년. 대성사의 나이 7세 때의 일이다.
대성사 가족이 자리를 잡은 곳은 압록강에서 가까운 동변도, 중국 봉천성 환인현 남관南關, 즉 지금의 선양시에서 국경을 향해 남동쪽으로 치우친 곳이다. 주몽이 이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여 동명성왕이 된 후 졸본이라 불렀다. 고구려 유적인 오녀산성이 있어 압록강을 넘은 대한국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됐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 후 이 지역은 신성한 땅으로 출입을 금하였는데, 청이 세력을 잃자 조선말부터 조선인들이 월경하여 사실상 우리 민족이 정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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