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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위한 실천수행 ‘지계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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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법문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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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법경 정사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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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2-11 13:39 조회 2,1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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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BBS 부산불교방송 법경 정사의 수요법문 (4회)

나 자신을 위한 실천수행 ‘지계바라밀’

지계는 계율을 지킨다는 뜻, 수행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아

지계는 곧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생활


반갑습니다. 이 시간에는, 불교의 수행 가운데 불교의 모든 실천 교리를 망라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육바라밀 실천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는 육바라밀 실천 가운데, 첫 번째 실천수행인 보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내면적 성숙과 함께 이타행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타행의 대표적인 실천수행이 바로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라고 경전에서도 설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덕은 남을 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타심으로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보시행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위한 실천수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계입니다. 즉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육바라밀 실천수행 가운데 지계바라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킨다는 뜻인데요, 계율은 불교 수행자게에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이 청정하지 않으면 수행이나 불공, 기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점을 깊히 자각하셔야 합니다. 크게 깨쳐야 합니다.

불자라고 하면서도 계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겨자씨만치라도 있지 않다면, 불자라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입으로 짓는 업은 지계로써 경계하고 삼가야 합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특히 기도나 불공기간에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계행을 철저히 지켜야 청정한 일념으로써 깨달음을 이룰 수 있고, 또 현실생활에서 세간적 소원성취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이 청정해야 바른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수행이란 바로 심신의 청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정에서 깨달음이나 공덕성취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청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행은 곧 청정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계행(戒行), 지계(持戒)는 바로 청정(淸淨)’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계를 청정지계(淸淨持戒)’라고 합니다. 청정하지 않으면 를 지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를 정계(淨戒)라고도 말합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청정해지고, 청정함으로써 두텁고 두터운 업장이 소멸됩니다. 사실 업장소멸이 되어야 서원성취가 가능합니다. 청정하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해탈의 주춧돌이라고도 합니다. 구름이 걷혀야 밝은 태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계를 지키는 생활은 출가수행자에게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규범이 아닙니다. 출가수행자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모든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 태어나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특히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계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물질만능, 황금제일의 초현대사회에서 무슨 계율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산업은 4차로를 달리고 있지만, 심신은 갈수록 비좁고 황폐해져 1차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정한 삶과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오늘날 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계는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지구촌의 마지막 보루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말법시대를 구제하는 길은, 오로지 청정한 생활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드립니다.

지계는 바로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생활입니다. 이를 방비지악(防非止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고 불공하면서, 과연 계를 제대로 지키고 있을까요?

또 가족의 서원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면서 행동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이 선업을 짓는 것일까요? 악업을 짓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것은 악업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불공해서 얻은 공덕이 많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악업을 일삼으면 그 공덕을 모두 까먹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왼손으로 악을 행하고, 오른손으로 선을 행한다면, 우리는 이를 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선이라고 합니다. 위선은 나를 속이고, 상대를 속이고, 부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속이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생활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자신은 항상 청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악업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불공을 하면서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고 악업만을 쌓는다면, 그 불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큰 공덕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불공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소원성취와 재난소멸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깨달음이나 성불, 마음의 안정을 바라는 분도 물론 계시겠지만, 정작 일상생활이 불선(不善)하다면 과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불공한 공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공덕이 크게 일어나지도 않고, 또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공덕은 시들시들해지고 맙니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콩을 아무리 볶아 봐야 제대로 콩이 볶일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말린 콩은 바로 우리의 청정지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를 지키지 않으면, 즉 청정하지 않으면, 절대 수확할 수 없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데서 어떻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인선과(善因善果)라고 말합니다. 좋은 과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인을 지어야 하는데, 수행에 있어서 좋은 인이란 바로 계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보시행도 물론 좋은 인이지만 아무리 보시를 많이 했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나쁜 행동을 일삼고 입으로 온갖 구업을 짓는다면, 앞의 보시행은 결국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보시를 행하여도 계행이 없으면 그 보시행의 공덕도 완전한 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을 심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반쪽짜리 종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종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불공이 되었든간에 정말 자신 스스로 바르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행하지 않고는 올곧은 열매를 수확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바른 행을 행해야 충실한 과일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업이 되므로 행동 하나하나에 항상 청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업은 바로 자신의 행동에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업은 절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는 결국 자기 자신이 짓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계행은 정말 중요합니다. 보시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면, 계행은 오로지 자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청정지계를 강조하는 것은, 지계가 악과보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공덕 짓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막기 위해서 설정해 놓은 생활규범인데요, 처음에는 이를 지키고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나, 이후에는 온갖 선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을 살찌게 하는 행위까지를 모두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범위가 넓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계라고 하는 것은 근본오계 뿐만 아니라 ()을 행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모두 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보시바라밀도, 넓은 의미에서는 계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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