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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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3.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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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생활법문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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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법경 정사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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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2-06 11:04 조회 2,78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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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는 육바라밀 중 상구보리 하화중생 제일의 덕목 ... 인색함과 탐욕심을 버리는 자리이타의 대아적 실천

지난 호에는 불교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내면적 성숙과 함께 이타행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수행 가운데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나 선택해서 이 시간에 말씀드리기로 했는데요, 실천 가운데 육바라밀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육바라밀은 십선을 포함해서 불교의 모든 수행실천을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합적인 수행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육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는 육바라밀 가운데 제일의 실천덕목입니다. 왜 제일의 실천덕목인가. 모든 수행에서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입니다. 남을 위해 보시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발심하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행입니다.

나를 위해서 행하는 불공은 소아적인 것이지만, 남을 생각하고 베푸는 마음은 대아적인 것으로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불공하는 사람의 제일의 마음 자세입니다.

베푸는 실천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크게 키우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보시를 통해서 나의 인색함과 탐욕심을 버리는 수행을 배우게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기도와 불공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시에서 나의 소원성취가 있고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라고 하면, 보시행을 통해서 내가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저 언덕은 작게는 나의 소원성취요, 크게는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언덕으로 간다는 것은 내가 보시행을 통해 참다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참다운 삶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남을 돕고 자비의 정을 베푸는 가운데 내가 더 행복해지고 내 삶이 더욱 넉넉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함경』에서도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행이 우리에게 전하는 더 큰 의미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준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보시는 부처님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금의 아상(我相)도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보시란 즐겁고 환희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깨끗하게 물질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있을 때는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아낌없이 내보내는 것이고, 큰 서원이 있을 때는 부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와 고마운 마음으로 전하는 것일 뿐 절대 주고받는 거래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머무는 바 없이 베푼다면, 그 뜻은 더욱 깊고 공덕 또한 무량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말할 때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보시하는 사람이 깨끗하고, 보시 받는 사람도 깨끗하고, 보시하는 물건도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시에 청정(淸淨)이 중요한 코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 묻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뭔가 바라고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주상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행할 때는 ‘다섯 가지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합니다. 그 다섯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면 진정한 보시바라밀이 됩니다. 즉 보시를 행함으로써 내가 부처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를 통해 내 저 언덕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여 할까요?

그 다섯 가지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항상 베푸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보시는 베푸는 마음이 항상 가득해서 실제로 보시행 그자체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시(財施), 법시(法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재시(無財施)로도 얼마든지 보시행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소, 따뜻한 말, 칭찬, 자리양보, 배려, 이해)


둘째, 베푸는 마음과 함께 거기에는 항상 따뜻한 자비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 없는 보시는 일시적인 전시나, 아상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셋째, 보시행과 함께 발원(發願)을 세워야 합니다. 도움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마음까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부처님께 단 돈 100원이라도 보시하는 마음이 깊은 신심이오, 커다란 발원입니다.

넷째, 항상 회향(廻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공이나 기도를 마칠 때나 좋은 날에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실제로 보시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올린 기도나 불공의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서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섯째, 보시를 행할 때 더 좋은 방법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행하는 보시가 아니라 찾아가면서 적극적으로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더 잘 도와줄 수 있을까? 무엇으로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하는 것을 늘 생각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이러한 보시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비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절에서 불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 또 병들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작은 보탬을 주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도움을 주는 것들이 모두 보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보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을 전하는 보시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좋은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의 보시는 대부분 기부나 선행 같은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보시는 그 공덕이 무량하지 않고 육신의 인연이 다하면 함께 끝나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법보시는 일체 중생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으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시입니다. 이것은 법을 전하는 자도 법을 듣는 자도 모두 큰 공덕을 얻고 지혜를 얻어 깨닫는 공부입니다. 법보시행은 불교의 훌륭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물질보시는 보시하는 자에게는 복덕이 있으나 보시받는 사람은 베풂을 받기만 하니 복이 없고 내생에 거지로 태어나기 쉽다. 그러나 법보시는 법을 전하는 자의 업장을 소멸하고 법을 받는 자의 탐진치를 없애니, 물질이 없어도 겨자씨만 한 깨달음만 있어도 가능한 것이 법보시’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보시란 무엇이든 간에 자비심으로 베푸는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베푸는 것입니다.

베풂으로써, 베푸는 자신이 흐뭇하고, 받는 상대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 그야말로 자리이타의 행이 바로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실천이자 멋진 보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복을 받는 것은 나의 실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보시행을 꾸준하게, 그리고 묵묵히 실천하고, 용맹정진하시기를 서원합니다.

기도하고 불공하는 가운데 참 실천을 하셔서, 가정마다 재난소멸은 물론이고, 소원하는 바를 모두 성취하시기를 서원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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