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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되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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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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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1-05 15:00 조회 2,6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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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4회)

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되찾겠다
부친 손기현, 나라의 독립위해 수많은 의인들과 망명길로··· ‘산 것 해치지 말고 미물조차 귀하다’ 불심 깊은 모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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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30년 대 대성사 가족. 맨 왼쪽 뒤 원정 대성사. 가운데 부친 손기현, 모친 이근호 님



대성사의 조부는 웅천에서의 임직을 마치고 안동 현감으로 영전한다. 안동 현감 이후 함경도 6진 중 요충지인 훈융진의 사령관 격인 훈융 첨사로 임명됐으나 연로한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했다. 고종 17년인 1880년 1월 손규헌은 지금의 평안도 강계에 해당하는 신광(新光)의 첨사(僉使)로 임명 됐다. 신광은 압록강을 마주하여 간도 접경이며 국방과 교역의 요충지이다. 신광 첨사는 무관으로 승진을 위해  거쳐야할 요직인 것이다. 후일 어린 대성사는 이 신광 땅을 밟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가니 인연의 뿌리는 깊고 오묘하다. 

그해 4월 15일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의 지시가 기록돼있다.


“신광 첨사 손규헌이 길을 떠나며 인사를 하니 긴 활과 화살, 애기살과 통아 등을 내려주라(備忘記, 神光僉使孫珪憲下直, 長弓一張, 長箭一部, 片箭一部, 筒兒一箇賜給)”

임직을 받아 떠나는 무관에게 활과 화살 일체를 챙겨 하사하는 관례가 있었고, 고종 임금은 나라를 위해 멀리 변방으로 떠나는 신광 첨사를 위해 믿음의 표시를 하사한 것이다.  

손규헌은 아들 셋과 딸 넷을 두는데, 첫째는 가문의 후사를 위해 양자로 보냈고 둘째인 기현(基賢)이 대성사의 부친이다. 성사의 부친은 조부가 40세가 넘어 늦은 나이에 북쪽 임지인 신광에 있을 때 태어났다. 


대성사가 어떻게 자랐으며 누구인가를 알려면 뼈와 살을 주고 명을 내려준 부모를 살피는 일이 당연하다. 부친인 손기현(孫基賢, 1883~1942)은 조부의 영향으로 타고난 무골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병사를 호령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고 자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천성을 지녔다. 하지만 국운은 이미 기울어 더 이상 무반으로 진출할 길도 세상을 위해 꿈을 펼칠 기회도 사라진 시대를 살아야 했다. 구한말 어지러운 정세에 조부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밀양 죽서리로 낙향 은거 한다. 정국이 어렵고 정치가 오염됐을 때 일직 손씨 조상들이 행하였던바 옛길을 따라간 것이다. 

손기현의 다른 이름은 기준(基準)이고 자는 보현(甫賢)이다. 재령이씨 이근호(1884~1968)와 혼인하여 아들 둘, 딸 둘을 두었으니, 그 중 둘째 아들이 손민호, 대성사이다. 재령이씨는 영남 남인의 중심으로 번성하던 가문을 일군 밀양의 대표적인 권세가였고 부자 집안이었다. 대성사의 모친은 시집 올 때 예단 뿐 아니라 찬모며 침모를 길게 거느리고 와 인근의 화제가 됐다고 전한다.

모친 이근호는 불심이 깊어 늘 말과 행동을 삼가하여 산 것을 해치는 일을 보면 말리고 꾸짖어 미물이라도 귀하게 여기기를 바랐다고 한다. 방안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도 종이로 살짝 들어 밖으로 치울 정도로 조심했는데, 대성사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의 불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성사가 세상에 난 것이 1907년, 시대는 어렵고 가혹했다.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일제 침탈을 알리는 특사를 보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이토 히로부미의 건의로 이완용 내각이 들어섰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총을 겨누고 압박하여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정미 7 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그 이튿날 순종 황제가 즉위했으나, 전국 곳곳에서 본격적인 항일 의병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해산된 군대와 전국의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한양에 진격하고 전국의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시국의 여파는 대성사의 고향 밀양에도 고스란히 닥쳤다. 일찌감치 친일 조직 일진회(一進會)가 밀양에 조직돼 활개를 치고 다녔다. 일제 순사들이 밀양에도 주둔하며 불온한 기미를 싹부터 짓밟고 있었다. 

6월이 되자 밀양 현감은 병을 핑계 삼아 문을 걸어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동시에 일본어 학교를 휴교시키고 고종 양위 당시 체포됐던 이들을 모두 풀어주고 만다. 밀양 유천 일대에서 의병 30여 명이 봉기하자 일본 순사가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한마디로 밀양의 분위기는 시국을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밀양군 상남면에는 금광이 있었는데 1907년 3월 일본인 토시마라는 자가 광업권을 따내서 군민들의 원성을 샀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밀양 은행을 설립하고 계속해서 자본 수탈을 위한 금융조합을 만들었다. 밀양은 일제에 의해 영남권 경제침탈의 교두보로 인식되면서 그야말로 일인들의 수탈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압박은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논에 심는 벼마저 일본 종자인 하야카미리키(早神力)를 심도록 강요받고, 1908년에는 드디어 밀양에 보통학교가 세워져 일제의 공민 교육과 융화정책이 시작된다. 일제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나라를 빼앗겼다는 시름은 점점 깊어졌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의 길을 걷는 자들이 속출하고, 총을 들어 저항하던 이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그래도 항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1908년 8월 21일에는 의병 20여 명이 밀양 헌병 분견대와 전투를 벌였고, 10월 2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밀양에서 의병 20여 명이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밀양 인근은 경남 의병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됐다. 

1909년이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지는데,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처형된다. 1910년에는 결국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폐지되고 만다. 

500년을 이어가던 조선의 역사가 끊긴 것이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가 임명되었고,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명목으로 조선의 농지 수탈하고 경제를 파괴하여 압박과 수탈에 나섰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 투쟁은 그치지 않고 일제를 괴롭혔다.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전투를 벌였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무려 2,700회의 전투가 벌어졌다. 

참가 의병은 약 4만여 명으로 전국 어느 한 곳 빈틈없이 조선 전역에서 격렬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1909년 9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 일명 남한 대토벌을 벌이게 되는데 의병 토벌을 빌미로 양민에 대한 무차별 살육과 약탈을 벌여 잔혹함을 드러냈다. 103명의 의병장이 전사하고 23명의 의병장은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항일을 처절히 응징함으로써 반항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그런 폭압에도 저항은 사라지지 않고 더 거세졌다. 

1909년 10월 5일 밤 의병들은 밀양에도 나타나 일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실히 했다. 의병이 모습을 보인 곳은 대성사의 집이 있던 산외면 인근인 부북면으로 소식은 삽시간에 밀양 전역으로 퍼졌고 일본 헌병 주재소는 급박한 사정을 총독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시대는 점차 항전의 분위기를 높여가고 있었다. 의병들은 국내에서도 전투를 벌였을 뿐 아니라, 압록강을 건너가 거점을 만들어 무한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성사의 부친은 타고난 무인이었다.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뜻을 굽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그르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무릎 꿇고 살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망국의 시대에 수많은 의인들이 총을 들고 싸우기 위해 망명길을 나서게 된다. 모두가 침묵할 때 훌쩍 일어서 싸우기에 나섰으니 그들이 당시 외친 말은 “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되찾겠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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