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사 부친, 독립군에게 무기를 조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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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3-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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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3-07 13:36 조회 2,054회본문
대성사 부친, 독립군에게 무기를 조달하다
“나라를 빼앗겼지만 정신은 뺏기지 않았고 하루도 항쟁을 멈춘 날이 없었다.”
한교공회, 일제 침략기관 습격과 앞잡이 처단에 앞장
척박한 삶 속에서도 학교를 세워 민족정기를 가르쳐
환인현 남관은 밀양과 비슷한 곳이다. 길림성 백산시 주변에서 발원하여 1,000리를 굽이쳐 흐르다가 환인현에 이르러 잠시 마을을 에워싸고 다시 남쪽 압록강에 합류하는 훈강(혼강, 渾江)이 흐른다. 남관은 환인현의 남쪽 지역으로 강과 가까이 있어 농사짓기 적합한 곳이다. 밀양강이 굽이치다가 낙동강과 합치는 모양과 흡사한 지형으로 고향 삼아 터를 잡을 만한 곳이었다. 환인현은 초산에서 월경한 조선인들이 처음 정착하는 땅으로 서북쪽으로 봉천(奉天)이 있고 동북 방면으로 통화시(通化市)와 백산시(白山市), 북쪽으로 장춘(長春)과 지린(吉林, 길림)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옌볜(延邊, 연변)이고 서북으로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이 있는 북간도 땅이다. 환인은 서간도 입구의 요충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며 일군과 맞선 독립전쟁의 최전방 전선이었다.
불모지였던 땅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훈강의 물을 끌어들여 만주 땅 최초로 논을 개간하여 벼를 심었다.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내 밭을 일구고 옥수수와 귀리, 기장 따위를 심어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만주족의 토지라 소출의 절반 이상, 삼분의 이 정도를 바쳐야 소작으로 농사지을 땅을 얻을 수 있었다. 대성사 가족 또한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다. 어린 대성사 형제도 돌을 나르고 밭을 가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두가 매달려야 곡식 일굴 밭 한 뼘이라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을 짓고 돌담을 쌓았다. 평생 양반으로, 대대로 벼슬에 나섰던 무반의 자손으로 명망과 부귀를 누렸던 대성사의 부모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어린 자식까지 메마른 만주 바람을 맞으며 노동을 해야 하는 삶은 거칠고 힘겨웠다.
대성사 여동생이 남긴 회고담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지은농사는 옥수수, 콩, 감자에 조라고 했다. 그것도 일가족이 다 나서서 쉼 없이 땅을 고르고 일구어 겨우 연명할 양식을 거둘 수 있었다. 사립문 밖에는 손수 일군 옥수수가 강변까지 길게 밭을 이루고 있었다. 거친 곡식이지만 이곳에서 식솔을 건사하고 후일을 도모하기에는 모자라지 않은 나날이 이어졌다. 쌀과 보리는 구경도 할 수 없었지만 그곳엔 노예를 벗어난 자유가 있었다. 그런 척박한 삶 속에서도 서간도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정기를 가르치고, 독립군을 키워냈다. 나라를 빼앗겼지만 정신은 뺏기지 않았고 하루도 항쟁을 멈춘 날이 없었다. 서간도 일대는 독립세력의 중심지이며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가 있던 곳이라 일본 밀정들의 움직임도 왕성했다. 얼마나 많은 밀정들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봉천 일대가 독립운동의 중심지란 소식을 듣고 만해 한용운이 1912년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러 서간도로 건너왔다. 낯선 인물이 독립운동가들을 탐문하고 다니자 만해를 밀정으로 의심한 독립군은 총격을 가하였고, 천만 다행히 만해는 목숨을 건져 돌아갔다. 그만큼 흉흉하던 시절에 대성사 가족도 서간도에 정착한 것이다. 1910년대 서간도의 생활은 참혹했다. 이주해 온 조선인들은 풍토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중국 지주의 수탈, 군벌과 도적떼의 약탈도 망명객들을 괴롭혔다. 이주민과 망명객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먼저 자치 기구를 만들고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곧이어 독립군을 양성해 군사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손기현은 당시 망명객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동지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기꺼이 나서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자치 기구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나섰고 동포가 어려움을 당하면 몸소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때문에 1919년 상해 임시정부와 연관된 서간도 독립운동의 주체 세력인 서로군정서 산하 조직인 한교공회(韓僑公會)에서 외교원(外交員) 신분으로 일하게 된다. 한교공회는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성좌 윤세용(聖佐 尹世茸)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세운 임시정부 산하 무장독립투쟁 단체이다. 손기현의 집은 독립운동가를 위해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 독립군이라면 누구나 손기현의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용기와 힘을 내 일본군과 맞서 싸우자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한교공회는 대성사 가족이 머물던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본부를 두고 서간도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설립 목적은 일제 침략기관을 습격하고 앞잡이들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며, 만주 일대에서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대성사 부친이 맡은 외교원은 러시아 및 만주 군벌들과 교섭하여 독립군을 위해 무기를 조달하는 임무였다.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일명 체코군단이 해산되어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그들의 무기 대부분을 독립군들이 사들이게 된다. 대성사의 부친은 권총과 기관총, 탄약과 폭탄 등 다량의 무기를 독립군에 공급하였다.
* 종조 일대기 편찬 중 대성사 부친 손기현(孫基賢, 1883~1942) 님이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으며, 2016년 후손 미상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바 있다. 유가족은 1년 여 간의 노력으로 지난해 광복 76주년을 맞아 고인의 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전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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